론설 : 강도적인 방법으로 《한일의정서》를 조작한 일제의 죄악
1904년 2월 23일은 일제에 의하여 《한일의정서》가 조작된 날로서 우리 민족사에 일제의 피묻은 죄악의 한페지로 기록되여있다.《한일의정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강점이 후안무치한 날강도행위였다는것을 명백히 립증해주고있다.
《한일의정서》조작은 일제가 군사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였다.
일제의 《한일의정서》조작시도는 로일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였다.1903년 12월 30일 일제는 《각의》에서 《한국에 관여하여서는 어떠한 경우에 림하더라도 실력으로써 이를 우리 세력권하에 두지 않으면 안되는것은 물론이지만 가능한한 명의가 서는것을 택하는것이 상책이므로…보호조약을 체결할수 있으면 가장 편리할것이다.》라고 결정하였다.결국 이것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되 거기에 《외교적인 문서》로 외피를 씌운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1904년 1월까지 무려 5개월간에 걸쳐 《외교적인 방법》으로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으나 조선봉건정부의 반대로 파탄되고말았다.
모든것이 실패하자 일제는 군사적힘으로 《의정서》를 강압체결하려 하였다.일제는 로일전쟁의 도발과 함께 이를 구실로 무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여 우리 나라를 군사적강점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몰아넣었다.1904년 2월 6일 일제는 짜리로씨야에 국교단절을 통보하는 동시에 미리 편성해놓은 《한국림시파견대》에 출동명령을 내려 인천에 상륙하도록 하였다.
《한국림시파견대》는 한성에 도착한 순간부터 침략군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냈다.온 나라가 침략군의 군화발에 짓밟혀 란무장으로 화한 사실에 대해 당시 《매천야록》은 《왜군이 인천에서 한성에 들어온것이 병졸이 5만여명이고 말이 1만여필로서 창덕궁, 문희묘, 환구단, 제경궁, 광제원, 관리서 등 무려 18곳에 련이어 군영을 삼아 주둔하였다.》고 하면서 일제침략군의 점령소식을 상세히 전하였다.일제는 전 조선령토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상태에서 침략적인 《한일의정서》를 조작하였던것이다.
《한일의정서》는 일제의 끈질긴 폭압책동의 강도적인 산물이였다.
조선봉건정부의 최고통치자와 고위관리들에 대한 위협공갈, 랍치구금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일제는 고종황제를 저들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황궁을 봉쇄하여 그를 감금상태나 다름없는 지경에 몰아넣었다.이와 함께 반일적립장을 가진 조선봉건왕조의 고위관료였던 리용익을 랍치하여 일본으로 끌어가는 등 《의정서》체결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모략책동을 감행하였다.
사실 리용익, 현상건, 리학균, 길영수 등 관리들의 강한 반발로 하여 《한일의정서》는 조인을 하루 앞두고 파탄에 처하게 되였었다.반대세력을 그냥 두고서는 《한일의정서》를 비롯한 그 어떤 《조약》도 조작할수 없다고 타산한 일제는 침략군을 동원하여 반대세력체포소동을 벌려놓았으며 한밤중에 반대파의 거두인 리용익을 체포구금하여 파직시키고 일본으로 압송하였던것이다.
일제는 이렇듯 반대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고 리지용을 비롯한 친일분자들에게 위압을 가하여 끝끝내 《한일의정서》를 조작하였다.
《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상태에 이르게 된 마지막단계에서 그 체결을 맡은 외부대신 리지용이 두려워 달아나려고 하자 그를 연금상태에 두도록 하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