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필봉으로 재일조선인운동을 추동해온 자랑스러운 행로
언제나 조국과 운명을 같이해온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온 나라가 당창건 75돐을 성대히 경축한 지난 10월 《조선신보》창간 75돐도 기쁜 마음속에 기념하였다.
누구나 못 잊을 추억속에 더듬어보았다.
총련의 승리의 력사를 수록하고 재일조선인운동의 힘찬 전진을 추동해온 《조선신보》의 자랑스러운 로정을.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신보〉를 비롯한 출판물은 총련의 수중에 장악된 위력한 사상적무기이며 동포대중을 교양하고 조직동원하는 중요한 선전수단입니다.》
세계에는 해외교포들의 권리와 리익을 대변하는 출판물이 적지 않지만 《조선신보》처럼 위력하고 권위있는 해외교포출판물은 없다.
《애국위업의 믿음직한 방조자, 진정한 대변자》, 《애국의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 참다운 길동무》…
이것이 총련 《조선신보》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정에 넘친 부름이다.
그리운 조국소식과 동포사회의 희로애락이 글줄마다, 사진마다 어려있는 《조선신보》는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마음의 길동무로 되고있다.
신문을 펼쳐보는 그들의 가슴속에는 자랑과 희망이 가득 넘친다.
위대한 어버이의 손길아래 주체적해외교포운동의 시원이 열리던 못 잊을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영광의 년대기에는 조선신보사 일군들과 기자, 편집원들의 충성의 자욱도 력력히 새겨져있다.
해방직후 자그마한 등사인쇄물을 발간하는것으로 첫 자욱을 뗀 조선신보사였다.그러한 단위가 오늘은 여러가지 출판보도물을 찍어내여 세계의 백수십개 나라와 지역에 보급하는 권위있는 신문사로 강화발전되였다.
《민중신문》, 《우리 신문》, 《해방신문》, 《조선민보》 그리고 오늘의 《조선신보》로 그 이름이 여러번 바뀌였지만 신문의 애국애족적인 성격과 내용에서는 변함이 없다.
조국해방후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따라 애국의 한길로 나아갈 확고한 결의밑에 투쟁에 떨쳐나선 재일동포들은 자기들의 진정한 리익과 의사를 대변하는 출판보도물을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주체34(1945)년 10월 《조선신보》의 전신인 《민중신문》이 창간되였다.
당시의 환경에서 글을 써본 경험이 있는 기자들이 매우 부족하였다.일본땅에서 우리 국문활자를 구한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게다가 일본반동들은 갓 태여난 재일동포들의 신문을 요람기에 말살하기 위해 갖은 비렬한 책동에 매여달리였다.
하지만 이역의 언론인들은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신 감격적인 소식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이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 민주조선건설에 떨쳐나선 조국인민들의 들끓는 기세를 신속히, 격조높이 전함으로써 재일동포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고 민족권리옹호를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반동들이 공화국의 국장과 국기의 공식사용과 해설선전을 무작정 금지시키였을 때에는 공화국기사수투쟁의 나팔수로 앞장섰다.
신문은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고무자, 정신적량식을 주는 벗이였고 원쑤들에게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비수와도 같았다.
악에 받친 반동들은 침략자들이 조선전쟁을 일으킨지 두달만에 이 신문을 강제페간시키는 파쑈폭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굴하지 않고 완강한 투쟁을 벌려 2년만에 복간을 실현시키고야말았다.
신문이 페간될 때 출판기자재들이 모두 압수되였으므로 모든것을 새로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그중에서도 제일 난문제가 바로 국문활자였다.
밤을 밝혀가며 활자를 깎고 끼니를 번지며 조판을 하느라 신문사성원들의 눈에는 피발이 섰다.
이들의 고충을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한창이던 그 준엄한 시기에 국문활자를 보내주시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