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과학자가 수십년세월 걸은 강선길 -김책공업종합대학 금속공학부 연구사 교수 박사 박경룡선생에 대한 이야기-
뜻깊은 올해의 첫아침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경애하는 총비서동지를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는 크나큰 영광을 지닌 공로자, 로력혁신자들가운데는 80고령을 가까이한 로과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 최근년간 보산제철소의 회전로에 로체송풍기술을 도입하여 주체철생산을 늘이는데서 핵심적역할을 한 김책공업종합대학 금속공학부 흑색금속연구소 주체철연구실 연구사 박경룡선생이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한생의 념원이 어려있는 주체철공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사연많은 강선길을 수십년세월 묵묵히 걷고걸은 로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지금 우리의 과학자, 기술자들은 당이 부르는 사회주의건설의 주요전구들마다에서 높은 과학기술연구성과로 통장훈을 부르고있습니다.》
박경룡선생이 보산제철소의 로동계급과 첫 인연을 맺은것은 1960년대말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웅대한 구상에 따라 주체적인 제철공업기지인 4월13일제철소(당시)가 건설될 때 박경룡선생은 회전로운영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풀기 위한 연구집단에 망라되여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그때 대학을 졸업한지 몇해 되지 않았던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수 없이 기뻤다.천리마의 고향 강선에서 현장기술자로 일하면서 쇠물을 꽝꽝 뽑아내는것은 대학시절 그가 품어온 꿈이였던것이다.졸업후 대학연구사로 배치받은것으로 하여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그는 우리의 야금기술을 하루빨리 발전시키고 나라의 강철공업을 떠메고나갈 인재들을 키우는 일 역시 쇠물을 끓이는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잡으며 교정에서의 연구사업에 전념하고있었다.
그런데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그 소원을 이루게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연구사업을 한다는것은, 한마디로 불을 다루고 불을 길들인다는것은 결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였다.불길의 형태와 불꽃의 크기, 용성물의 상태 등을 그때에는 육안으로 감시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했는데 실로 조련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피곤이 몰려 로앞에서 깜빡 졸았는데 한 용해공이 달려와 그를 흔들어깨우더니 로앞에서 졸면 사고가 난다고 하는것이였다.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점직해하는 그를 보며 용해공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었다.
《교대작업에 진입하기 전에 우리 용해공들은 절대 사고를 내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요.다 우리 수령님의 은덕이지.
하루빨리 저 회전로에서 립철을 꽝꽝 생산해서 전기로에 보내주어야 그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할수 있을텐데.…
연구사선생, 부탁컨대 우릴 잘 도와주시우다.》
오랜 로동자의 이야기가 박경룡선생에게 준 충격은 컸다.
하여 그는 연구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회전로운영방법을 보다 완성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그렇게 여러해가 흘렀다.립철련속제강법을 확립하기 위하여 현장에서 살다싶이 하던 어느날 박경룡선생은 연구사업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평양에 올라왔다.오래간만에 만나 회포를 나눌새도 없이 또 집을 나서는 그를 안해인 김숙영녀성이 따라서며 언제 돌아오는가고 물었다.
출장길이 처음도 아닌데 그런걸 왜 묻는가 하여 의아해하던 박경룡선생은 눈물이 글썽해진 안해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해산을 앞두고있는 사실을 상기했다.그는 안해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말했다.
《줄창 나가 사는 나때문에 당신이 참 고생이 많소.하지만 당신도 잊지 않았겠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후 강선에 오셔서 강재를 1만t만 더 생산하면 나라가 허리를 펼수 있다고 하시였다는걸 말이요.물론 그때보다는 강철생산량이 훨씬 늘어났지만 아직 나라엔 철이 더 많이 필요하오.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어떻게 한시인들 강선길을 지체할수 있겠소.》
그의 절절한 말에 안해는 눈물을 거두었다.그러고나서 이제 가면 언제 올지 모르겠는데 태여날 아기의 이름이라도 지어달라고 하는것이였다.
박경룡선생은 벙긋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철〉자가 들어가게 짓소.그러면 난 어떤 이름이든 다 좋소.》
금방 미소가 피여나던 안해의 눈가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샘솟았다.
철밖에 모르는 그 고결한 진정을 담아 철남이라 이름지은 아들이 자라고자라 대학생이 되고 어느덧 손자애가 태여났을 때에도 박경룡선생은 수십년전에 시작한 강선길을 멈추지 않았다.
강선길, 박경룡선생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떤 길이였던가.해방후 우리 수령님께서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 만경대를 지척에 두고 먼저 가시였고 전후 그처럼 어려운 때 강철전사들을 믿고 찬눈을 맞으시며 가신 력사의 길이였다.
그래서 그는 좋은 날에도 그랬지만 조국이 시련을 겪는 때에는 더더욱 그 길을 멈출수 없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심한 원료부족으로 삼화철을 꽝꽝 쏟아내던 보산제철소의 회전로들도 숨을 멈추었다.박경룡선생에게 있어서 숨죽은 회전로들을 바라본다는 그자체가 자기 명줄을 끊기우는것만큼 모진 고통이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