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매국역적들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반외세투쟁속에 흘러온 우리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볼 때 그 갈피에는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벌린 《한일회담》반대투쟁도 있다.
1960년대초 미제의 적극적인 조종밑에 《5. 16군사쿠데타》를 단행하여 권력의 자리를 타고앉은 군사파쑈《정권》은 저들의 정치적지반을 다지고 남조선을 영원한 《반공보루》로 만들려는 속심으로 여러해째 계속 벌려오던 일본과의 《회담》을 조기결속짓기 위해 발악하였다.
박정희군사파쑈독재자는 《일본은 침략적이 아니》기때문에 《선의의 일본자본을 도입할수 있다.》, 《남한은 방위를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떠벌이면서 친일주구로서의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놓았다.
군사파쑈독재자는 선행자들도 성사시키지 못하였던 매국적인 남조선일본《회담》을 성사시키려고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을 내들고 1964년 3월 12일부터 범죄적인 《한일회담》을 시작하였다.
《제2의 리완용》이 되여서라도 정치적목적을 실현시키려는 야욕에 미쳐버린 독재패당은 일제가 우리 인민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사죄, 배상과 관련한 《재산청구권》의 본질적의미를 거세하고 일본의 주장대로 《경제협력》의 미명하에 《배상금》을 3억US$로 규정하였으며 《어업문제》와 관련한 《협정》에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어로전관수역을 40mile로부터 12mile까지로 축소하고 어장중에서 노란자위로 알려진 지역까지 넘겨주기로 하였다. 특히는 《회담》에서 일본군성노예문제와 문화재반환에 관한 문제는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약속》들은 일본으로부터 6 600만US$의 뢰물을 받아먹은 대가로 이루어진것이였다.
그러고도 군사파쑈독재패당은 저들의 매국배족행위를 가리울 흉심밑에 《회담》과정을 일체 비밀에 붙이도록 하였으며 《협정》내막의 공개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총칼로 대답해나섰다. 더우기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피해자들과 그의 유가족들에게 제대로 주지 않은것은 물론이고 도리여 여러가지 사건들을 조작하여 《회담》내막을 덮어버리기 위해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이로부터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3. 24, 6. 3투쟁이 거세차게 벌어지게 되였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된 3. 24투쟁은 삽시에 남조선 전지역에 파급되였다. 《일본제국주의를 박살하라!》,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들고 3월 24일부터 30일까지 계속된 이 투쟁에는 서울을 비롯한 38개 지역의 37개 대학, 163개 중고등학교의 21만 7 000여명의 학생들, 1만여명의 시민들이 참가하였다.
70여일동안이나 줄기차게 벌려온 3. 24투쟁은 점차 반《정부》적성격을 띠게 되였으며 그것은 대중적 6. 3봉기로 확대발전하였다.
1964년 6월 3일 서울의 17개 대학과 2개의 지방대학 3만 2 800여명의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사퇴》를 행동강령으로 내세우고 시위에 들어갔으며 이에 1만여명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적인 반《정부》폭동에로 넘어갔다. 서울《시청》, 《중앙청》, 《국회의사당》일대는 완전히 시위자들에게 제압되였으며 남조선《정권》의 폭압기능이 일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투쟁이 날로 고조되자 극도로 당황망조한 독재패당은 그해 8월 그 무슨 《북의 지령》이니, 《국가반란획책》이니 하면서 《인민혁명당사건》이라는것을 조작하고 사건관련자들에 대한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1965년에 들어서면서 군사파쑈독재자는 인민들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상전의 지시에 따라 2월 20일 남조선일본《기본조약》에 가조인하고 《협정》체결을 서둘렀다. 이에 격분한 남조선인민들은 《제2의 을사조약을 무효화하라!》, 《매국노들을 몽둥이로 때려잡자!》 등의 구호를 들고 서울, 인천, 대구, 광주, 제주 등에서 또다시 대중적투쟁에 떨쳐나섰다.
그러나 군사파쑈독재자는 《일본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남한의 래일은 없다.》, 《제2의 리완용이 되더라도 한일회담은 꼭 끝을 맺겠다.》고 하면서 총칼로 인민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강도적인 수법으로 1965년 8월 14일 매국배족적인 《한일협정》을 정식 조인하였다.
남조선인민들은 이에 분격하여 또다시 일떠섰고 이 대중적항쟁의 폭풍은 삽시에 서울과 지방을 휩쓸었다.
이처럼 남조선에서 벌어진 《한일회담》반대투쟁은 일본의 죄상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그 범죄를 기어이 결산하려는 민심의 분출이였다.
그러나 박정희역도는 끝끝내 《한일협정》체결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죄악을 덮어버렸으며 그로부터 반세기후인 2015년 말에는 그의 딸인 박근혜가 일본의 과거범죄청산의 길을 가로막고 재침의 길을 열어주는 만고죄악을 저질렀다.
최근에는 일본반동들이 조선반도유사시 《자위대》파견을 계획하고 준비해온 사실자료들이 폭로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신》독재자의 후예인 《국민의힘》패당들은 《대선》정국에서 《유사시 일본자위대가 들어올수도 있다.》는 망발을 서슴없이 줴치며 사대매국노로서의 본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력사와 현실은 《한일협정》을 체결한 《공화당》의 후신, 친일매국의 본산 《국민의힘》을 매장해버리지 않고서는 일본의 과거죄악을 청산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남조선인민들은 일본의 과거죄악청산을 가로막는 친일매국역적들을 쓸어버리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나가야 할것이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