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수호전의 전초선에서 기치를 들고나가는 애국농민 -재령군 북지협동농장 제1작업반 반장 로력영웅 윤룡석동무에 대한 이야기-
만리마시대 전형들의 모범을 따라배우자
재령군이라고 하면 해방후 애국미헌납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제원농민과 2000년대의 김대성애국농민을 낳은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바로 여기서 오늘은 만리마시대의 전형이 배출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농사를 잘 짓자면 나라의 쌀독을 책임진 농업부문 일군들과 농장원들이 자기의 책임과 본분을 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당의 농업정책을 심장으로 받들고 북지협동농장 제1작업반 반장 윤룡석동무는 작업반원들과 함께 지대적특성에 맞는 다수확품종과 선진적인 과학농법을 적극 받아들이고 지력을 높여 해마다 논벼 정보당 10t이상 생산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농업전선은 사회주의수호전의 전초선이다.농사를 잘 지어 인민들의 식량문제, 먹는 문제를 푸는것은 우리의 사회주의를 지키고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정치투쟁이다.
오늘의 현실은 모든 농장원들이 다수확농민이 되고 분조, 작업반, 농장들이 다수확단위가 되여 나라의 쌀독을 가득 채울것을 요구하고있다.
자기 혁명초소에서 맡은 일을 책임적으로 잘할 때 조국이 부강해진다는것을 뼈에 새기고 다수확운동의 앞장에서 기치를 들고나가는 윤룡석동무, 우리 당은 북지리의 참된 애국농민인 그를 로력영웅,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 만리마시대의 전형으로 내세워주었다.
진정을 바치라
10여년전까지만 하여도 제1작업반은 농장적으로 제일 뒤떨어져있었다.이웃농장에서 갓 넘어오다보니 토대도 빈약하고 로력구성도 씨원치 않았으며 작업반건물도 볼품없었다.알곡생산계획은 계속 미달하고있었다.누구나 외면하고 발길조차 하기 저어하여 《곰보딱지》라는 수치스러운 별명까지 붙어있었다.
하기에 이곳 작업반장으로 일하게 되였을 때 윤룡석동무는 《알았습니다!》라는 대답을 쉽게 하지 못하였다.
리당일군이 한다하는 배짱가가 웬일인가고 하자 윤룡석동무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하였다.
《인민군대 사관장으로서 중대를 본보기단위로 만들던 그 솜씨로 한번 본때있게 내밀어보오.우리는 동무를 믿소.》
군사복무의 나날 그는 농사일을 돕기 위해 북지리에 나온적이 있었다.장진군의 어느 한 광산 로동자의 아들인 윤룡석동무는 그때 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쌀 한알한알이 얼마나 힘들게 마련되는가를 잘 알수 있었다.
수십년전 8월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몸소 이 농장에까지 찾아오시여 농사를 잘 짓기 위한 방도를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사연을 가슴뜨겁게 전해들은 그는 제대후 일생 지켜갈 전투좌지를 북지협동농장으로 정하였다.
재령벌에 제대배낭을 푼 윤룡석동무는 농사일을 직심스레 배우면서 농장원, 분조장을 거쳐 관리위원회 부원으로 일하였다.
당조직의 믿음과 기대속에 작업반장이 된 윤룡석동무는 이신작칙하면 농장원들이 따라올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분조, 저 분조로 분주히 뛰여다녔다.그러나 갈수록 실망감을 금할수 없었다.결근자들이 있는가 하면 일부 농장원들은 개인리기주의를 부리면서 작업반농사에는 열성을 내지 않고있었다.
윤룡석동무는 규률을 단단히 세워야 하겠다고 벼르었다.
우선 농장원들이 아침출근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분조들에서 그날과제를 어김없이 수행하도록 요구성을 높이였다.그러나 주관적욕망만 앞세우며 젊은 혈기에 사람들앞에서 욕설을 하고 감정을 폭발시켜 나중에는 심각한 의견이 제기되였다.
어느날 밤 그는 심한 괴로움속에 모대기며 작업반실토방에 앉아있었다.이때 길가에서 전지불이 비쳐들었다.
리당비서(당시) 오광철동무가 찾아온것이였다.
《반장동무, 대중과 한마음이 되여야 무슨 일이나 잘해나갈수 있소.농장원들을 탓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진정을 바쳐야 하오.》
준절히 깨우쳐주는 그의 말이 가슴을 쳤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