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피를 끓게 하는 명성황후살해사건
일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침략행위와 인간살륙만행의 피묻은 력사에는 《을미사변》으로 알려진 명성황후살해사건도 기록되여있다.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125년전인 1895년 10월 8일 일본살인무리들이 조선황궁을 기습하여 명성황후와 함께 수많은 궁녀들과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으로서 조선봉건정부에서 친로파세력을 제거하고 친일파세력이 득세하게 하여 조선강점야망을 손쉽게 실현하기 위해 일제가 주도세밀하게 계획하고 감행한 용납 못할 범죄행위였다.
당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짜리로씨야와 결탁한 조선봉건정부의 실제적인 권력자인 명성황후를 제거하지 않으면 대조선침략계획이 파탄될수 있다는 우려를 품은 일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황후를 살해하기 위한 흉계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악명높은 미우라를 조선주재 공사로 파견하여 살해음모를 추진시키게 하였으며 명성황후를 살해한 후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전준비까지 면밀히 갖추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의 지시밑에 일본군대, 경찰, 불량배, 친일무력인 《훈련대》 등이 망라된 살인무리는 경복궁을 불의에 기습하였다. 먼저 성문을 지키고있던 시위대 련대장을 사살하고 뒤이어 명성황후의 측근자였던 리학균을 체포하여 그를 앞세우고 명성황후의 침실에 뛰여들었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상태여서 명성황후의 얼굴을 쉽게 분간할수 없게 되자 살인무리는 맞다드는 궁녀들을 닥치는대로 칼로 찔러죽이였다. 이 과정에 명성황후도 칼에 찔려 쓰러졌다. 놈들은 명성황후를 알아보자 채 죽지 않은 그를 이불에 둘둘 말아 곤녕전 앞마당에 내다놓고 살아남은 궁녀들을 끌어다가 명성황후가 옳은가를 재삼 확인시켰다. 일본살인악당들은 범죄행위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그나마 살아남았던 궁녀들을 모조리 죽이였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명성황후를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버린것도 부족하여 그의 유골마저 못속에 집어던지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바로 이것이 명성황후살해사건의 진상이다. 이 사건은 일제야말로 저들의 침략적목적달성을 위해서는 한 나라의 황후까지도 야만적으로 살해하는 고금동서에 보기 드문 포악한 무리, 인두겁을 쓴 야수들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일제가 당시 조선민족이 국가주권의 상징으로 신성시하여온 황궁에 마구 뛰여들어 한 나라의 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것은 인륜도덕의 견지에서나 국제법적으로나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였다.
일제는 명성황후살해사건후 허위날조와 군사적강박으로 조선을 비법적으로 강점하고 40여년동안 류례없는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에게 헤아릴수 없는 온갖 불행과 재난을 다 들씌웠다.
명성황후살해사건이 있은지 1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일본반동들은 오늘까지도 피비린내나는 조선침략사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커녕 그 책임에서 한사코 벗어나보려고 교활하게 책동하고있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