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 비낀 판이한 모습
가정은 육친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사는 사회의 세포이며 기층생활단위이다.
매 가정에 사랑과 정이 넘치고 화목이 깃들어야 사람들은 밝고 명랑한 기분으로 보다 정열적으로 사업하고 생활할수 있으며 그 과정에 사회생활전반이 활기를 띠게 된다.
오늘 우리 나라의 가정들에서 꽃펴나는 고상한 륜리도덕은 사회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있다.
그것은 어느 한 은덕원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한 녀성의 생활을 놓고도 잘 알수 있다.
그는 뜨거운 진정을 기울여 로환으로 몸져누워있던 전쟁로병인 시아버지를 의료일군들의 방조밑에 끝내 일으켜세워 사람들을 놀래웠다. 그리고는 시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휴식일이면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등 풍만한 정서를 안겨주기 위한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였다.
친딸의 심정으로 시아버지를 극진히 돌봐주는 녀성의 모습은 자식들의 훌륭한 성장의 자양분이 되였다. 그의 자식들은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도와 할아버지의 건강관리에 도움이 되는 일을 스스로 찾아하였다. 그 나날 그들의 가슴속에는 선생님과 동무들, 인민반의 이웃들을 따뜻이 위하는 마음이 소중히 자리잡게 되였다.
덕과 정이 차넘치고 사랑이 흐르는 가정이 어찌 이 한가정뿐인가.
영예군인과 한생을 같이 하며 행복을 가꿔가는 가정들과 돌볼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을 친아들, 친딸이 되여 돌보아주는 가정들 …
남편과 안해, 부모와 자식들사이의 혈육의 정이 뜨겁게 흐르는 화목한 가정은 사회의 한 세포를 이루게 되며 이 화목이 곧 집단의 화목으로 이어져 건전한 풍조가 사회를 받들게 된다.
그러나 온갖 사회악이 판을 치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가정이라는 지붕아래서 혈육의 따뜻한 정과 사랑은커녕 서로 죽일내기를 하는 말세기적인 풍조가 만연되고있다.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벌어지고있는 폭력행위들이 적지 않은 경우 피해자의 가족과 일명 《친숙한 사람》들에 의하여 감행되고있다는것이다.
언제인가 어느 한 자본주의나라의 잡지에는 부모들의 폭행에 의하여 숨진 한 어린이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살인범은 뜻밖에도 피해자인 7살 난 어린이의 친어머니와 이붓아버지였다. 어린이는 죽기전에 부모로부터 무려 1시간나마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어린이가 죽은 후 그의 몸을 살펴보니 팔과 가슴, 다리는 온통 멍이 들어있었고 잔등에는 많은 화상자리가 있는 등 성한 곳이란 한군데도 없었다고 한다.
자기 자식을 그토록 처참하게 때려죽이고도 부모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참으로 가관이다.
항상 밥을 먹는것이 느리였다. 이번에도 <교양>의 일환으로 그렇게 하였다.》
그야말로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남편과 안해가 서로 죽일내기를 하고 갓난아이를 마구 내동댕이쳐 죽이는 등 자식들을 야수적으로 살해하는가 하면 부모를 돌보는것이 시끄러워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끔찍한 사건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고있다.
인간의 따뜻한 사랑과 정이란 찾아볼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회, 서로 물고뜯고 반목질시하며 개인의 탐욕과 치부를 위해서라면 몸서리치는 악행도 서슴지 않는 이런 부패한 사회에 도대체 무슨 앞날이 있으며 사람들의 행복과 희망이 있겠는가.
사회의 세포인 가정들의 이 판이한 모습을 통하여 인간사랑이 넘쳐나는 우리의 사회주의와 썩고 병든 자본주의의 하늘땅과도 같은 차이를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진정으로 앞날에 대한 희망과 밝은 미래를 가진 사회는 온 나라가 하나의 대가정을 이루고 사랑과 정을 꽃피워가는 우리 식 사회주의이다.
하기에 우리 인민들 누구나 소리높이 웨친다.
내 삶의 보금자리, 사회주의 그 품을 떠나 우리는 못살아!(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