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덕망으로 만민의 칭송을 받으신 희세의 위인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김정일동지는 한번 뜻을 나누고 손을 잡은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는 특유한 성품을 지니고있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는 비범한 사상리론적예지와 특출한 실력, 무한대한 포옹력과 신비한 감화력으로 온 세계를 품어안으시고 진보적인민들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신 인류의 태양이시다.한없이 따사롭고 은혜로운 그 품이 있었기에 우리 인민은 물론 세계의 수많은 나라 벗들도 온갖 도전과 난관을 이겨내며 자주와 사회주의를 위해 변함없이 투쟁할수 있었다.
은혜로운 품에 안겨 되찾은 생의 활력
로씨야의 로병작가인 까르뽀브는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온 그때부터 생의 활력을 되찾고 삶을 빛내인 외국의 벗들중의 한사람이다.
쏘도전쟁시기 붉은군대 정찰소대장을 한 까르뽀브는 전장에서 세운 위훈들로 하여 20대에 쏘련영웅칭호를 수여받았다.그는 전후에 제대되여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의 희망대로 소설을 쓰는 인간정신의 기사가 되였을 때에도 정찰병시절의 생활체험을 가지고 군사물주제의 장편실화소설들을 창작하였다. 《사령관》, 《생포하라》와 같이 그가 쓴 소설들은 교양적의의가 크고 실감이 있는것으로 하여 독자들속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그 력작들이 있어 까르뽀브는 쏘련작가동맹 제1비서로도 될수 있었다.
하지만 쏘련이 해체되자 까르뽀브는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정의와 량심의 옹호자, 대변자가 되여 사회의 진보를 추동하려던 작가로서의 리상이 물거품으로 되였다는 서글픈 생각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던것이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그에게 생의 활력을 되찾아주신분은 바로 우리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이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4(1995)년 11월에 이전 쏘련국방상 야조브의 일행으로 우리 나라를 방문한 그를 몸소 만나주시고 정찰병은 군인들가운데서도 가장 용감하고 대담하며 기지가 있고 행동이 민첩한 군인들이 선발되는것만큼 정찰병출신이 작가가 되면 군사물주제의 작품을 잘 쓸수 있다고, 우리 나라에서도 종군기자들이 좋은 수기를 써서 남겨놓았기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시면서 인민들을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시키는데서 혁명적문학예술이 노는 역할에 대해 차근차근 일깨워주시였다.
만민이 흠모하는 탁월한 선군령장의 가르치심을 받는 까르뽀브의 가슴속에서는 서서히 꺼져가던 옛 정찰병으로서의 긍지감과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다시금 부풀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계속하시여 인민대중이 자기 힘을 믿고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한다는것이 주체사상의 진수라고,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굳건히 고수되고있는것은 우리의 사회주의가 주체사상을 구현한 사회주의이기때문이라고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까르뽀브가 우리 나라에 체류하는 한달 남짓한 기간에 그를 무려 세번이나 만나주시였으며 다음번에 올 때에는 가족들도 다 데리고오라고 분에 넘치는 은정도 베풀어주시였다.
까르뽀브는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신의를 꼭 지켜가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발표하신 불후의 고전적로작《혁명선배를 존대하는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이다》에 접한 후 도서 《쓰딸린대원수》를 집필하고있던 그는 위대한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싶은 충동을 누를길 없어 주체88(1999)년 9월 또다시 우리 나라를 찾아왔다.
그를 반갑게 만나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쓰딸린을 위대한 군사전략가로 형상하려고 결심한것은 그야말로 정찰병다운 용감한 결단이라고, 작가들은 선각자가 되여야 한다고 적극 고무해주시였다.
그가 들어있는 숙소를 떠나실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뜨겁게 포옹해주시였다.그이의 한없이 따사로운 품에 얼굴을 묻은 까르뽀브는 격정에 목이 메여 어깨를 들먹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용감한 정찰병도 이럴 때가 있는가고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아들딸들을 공식초청하니 다음번엔 휴가기간을 약속하고 다같이 오라고, 건강하라고 말씀하시였다.
까르뽀브는 위대한 장군님이시야말로 자기가 참된 삶의 길을 걷도록 걸음걸음 이끌어주는 인류의 태양, 탁월한 스승이시라는것을 심장으로 절감하였다.
하기에 그는 우리 나라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로씨야에 가서도 김정일장군님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사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후 까르뽀브는 위대한 장군님께 결의를 다진대로 좋은 글들을 써서 발표하는 등 붓대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
고목에도 꽃을 피워준 따뜻한 사랑
70로년에 회춘을 맞이하였다고 온 세상에 소리높이 구가한 한 주체사상신봉자가 있었다.주체사상국제연구소 명예리사장이였던 이노우에 슈하찌였다.
하다면 이노우에 슈하찌가 어떻게 되여 로년기에 자기가 청춘을 맞이하였다고 긍지높이 웨쳤겠는가.
그때는 주체84(1995)년 3월이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생일 70돐을 맞는 이노우에 슈하찌를 평양으로 불러주시였다.이 소식에 접한 그는 너무도 꿈만 같아 가족들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부르죠아경제학비판론자로서 자본주의사회의 부조리한 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하여 일본정계와 학계에서 이름을 날렸다.하지만 참다운 인간사회를 찾지 못해 번민과 탄식속에서 계속 모대겨왔다.
그러던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고전적로작들을 탐독하면서 이 세상에서 사람이 가장 귀중한 존재이며 사람이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