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애국의 한길로 이끌어주시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속에 그이의 위대한 혁명생애를 경건한 마음으로 더듬어보게 되는 7월의 날과 날이 흐르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한없이 넓고 은혜로운 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크나큰 포옹력으로 따뜻이 안아주고 삶을 빛내여주신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숭고한 민족애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사상과 정견, 당파와 신앙에 관계없이 너그럽게 포옹해주시였다. 비록 민족앞에 불미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민족적량심이 있다면 어제날을 묻지 않으시고 대해같은 넓은 도량과 숭고한 덕망으로 뜨겁게 안아 사랑과 믿음을 주시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에 영원한 동행자로 내세워주신분이 바로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민족의 어버이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치에 매혹되여 숭미반공의 길을 버리고 련북애국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중에는 재미교포 김성락목사도 있었다.
그로 말하면 원래 평양출신으로서 일찌기 미국에 건너가 종교교육을 받고 돌아와 교회목사를 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간 후 오래동안 미국과 남조선에서 학계와 종교계에 몸을 잠그어온 사람이였다.
그런 그가 평양을 방문하게 된것은 우리 공화국의 정당, 사회단체들의 명의로 된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해 알아보고 겸해서 인생말년에 고향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미국에서의 오랜 생활과정에 우리 공화국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는 고향인 평양을 조용히 방문하고 돌아가겠으니 자기와 관련한 보도를 일체 내지 말아달라고 우리 일군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평양방문의 나날 만경대고향집을 비롯하여 변모된 평양의 여러곳을 돌아보는 과정에 지금까지 미국에서 들은 공화국에 대한 악선전은 모두 거짓이라는것을 깨달았으며 그에 속아 살아온 자기의 한생을 깊이 후회하였다.
그러던 주체70(1981)년 7월 3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전에 고향을 떠났던 김성락목사가 평양을 못잊어 찾아왔다는것을 아시고 그를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그를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늦게나마 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으려는 그의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기시여 그를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대해주시였으며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참된 애국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하나하나 깨우쳐주시였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식탁으로 초청하시면서 먼저 선생이 식전기도를 올려야 하지 않겠는가고 권고하시였다.
목사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얼굴이 붉어져 한동안 어쩔바를 몰라했다.
그러는 그를 바라보시며 수령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평생을 지켜온 신자의 도리를 어겨서야 되겠는가고, 어서 기도를 드리라고 재촉하시였다.
순간 목사는 평생 마음속에 맺혀있던 편견과 오해가 눈석이처럼 녹아버리고 따뜻한 봄기운이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다.
목사는 우리 수령님의 그 넓으신 도량과 포옹력에 감복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평생 해온대로 식전기도를 올리였다. 하지만 그 기도내용은 70평생 외워온 기도와는 전혀 다른것이였다.
그는 하늘이 낸 위인이신 수령님의 건강을 축원하여, 우리 민족의 통일과 나라의 완전독립을 념원하여 기도를 올리였다.
평양방문을 마치고 돌아가기에 앞서 김성락목사는 처음의 요구와는 달리 스스로 기자회견을 요청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를 올리던 때의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저는 주석님의 말씀을 어길수 없어 기도를 올렸습니다. 저는 충심으로 김일성주석님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로목사가 인생말년에 올린 기도, 그것은 단순히 평생 지켜온 종교례식이 아니였다.
그것은 민족의 어버이의 숭고한 애국의 뜻에 매혹되여 올리는 다함없는 감사의 인사였고 여생을 민족의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길에 아낌없이 바쳐갈 굳은 신념의 맹세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조국의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을 자애로운 사랑의 한품에 안아 통일애국의 한길로 이끌어주신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