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 후대교육을 위한 길에 새겨가는 순결한 량심과 헌신의 자욱 -평천구역 봉학소학교 교장인 공훈교원 리경애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교육사업은 량심이고 헌신이며 애국입니다.》
후대교육을 위하여 모든것을 묵묵히 바쳐가는 참된 교육자들속에는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지닌 평천구역 봉학소학교 교장인 공훈교원 리경애동무도 있다.
그의 교육년한은 25년, 한생을 교단에 바쳐온 오랜 교육자들에 비하면 결코 길다고 할수 없다.
허나 그는 남들이 한생을 바쳐온것과도 맞먹는 열정과 땀을 교육사업에 쏟아부었다.특히 교장으로 사업한 지난 10년간 그는 학교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자질향상의 불바람을 일으켜 많은 교원들이 10월8일모범교수자로 되게 하였다.또한 새 교육방법창조사업도 적극 벌리고 학생들의 학과실력을 부쩍 높여나감으로써 학교가 3중영예의 붉은기학교칭호를 쟁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후대교육을 위해 바쳐온 그의 불같은 삶은 교육자들에게 당이 안겨준 직업적혁명가의 영예를 어떻게 빛내여나가야 하는가를 다시한번 가슴깊이 새겨주고있다.
교육자가 되기 전에 애국자가 되라
지금으로부터 19년전이였다.
평천구역 간성동의 어느 한 가정에서는 밤깊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이젠 그만 쉬여야 하지 않겠소?》
《괜찮아요.한번 더 따져보아야겠어요.》
평양간성인민학교(당시) 교원으로 일하던 리경애동무가 남편의 방조를 받아가며 구역적인 교수방법토론회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며칠후에 진행되게 될 이 교수방법토론회에 구역안의 교원들이 출연하게 되는데 학교를 대표하여 리경애동무가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학교일군들은 지난 기간 교육사업에서 그가 발휘한 남다른 열정과 실력에 기대를 걸고있었다.그만큼 이 사업은 학교의 명예와도 관련된 책임적인 일이였다.
《당조직과도 토론이 있었소.난 경애동무가 잘해내리라고 믿소.》
이렇게 말하는 교장의 믿음어린 시선이 잊혀지지 않았다.
영예로운 과업을 받아안았지만 리경애동무에게는 걱정과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그때 첫 방조자가 되여준것이 바로 그의 남편이였다.
평양인쇄공업대학(당시) 교원인 남편 김성찬동무는 먼저 이런 의견을 주었다.
《교수방법에서 새로운것이 있어야 하오.창조적이여야 한단 말이요.》
이렇게 되여 리경애동무는 그사이 교육과학원(당시)의 연구사들도 만나 토의하면서 제목선정으로부터 교수방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품을 들여가며 교수방법토론회에 출연할 준비를 해왔다.탐구는 학교에서뿐아니라 집에서도 계속되였다.
그밤 따라 안해의 건강을 념려하는 남편에게 리경애동무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군데가 마음에 걸려 편히 쉴수가 없구만요.》
사소한 부족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안해의 마음, 교육자의 량심이 헤아려져 김성찬동무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리경애동무의 피타는 노력은 응당한 결실을 가져왔다.
교수방법토론회에서 보여준 그의 교수방법은 높이 평가되였다.이로 하여 그는 전국적인 교수방법토론회에도 참가하게 되였으며 학교에서 남먼저 새 교수방법등록증을 받아안게 되였다.그리고 이태후에는 구역적으로 몇명밖에 안되는 10월8일모범교수자대렬에 들어서게 되였다.
지금은 그에게 새 교수방법등록증만도 13개, 실험기구 및 교편물창안증과 교육과학성과등록증 등 많은 증서들이 있지만 교육자로서 처음으로 받아안은 새 교수방법등록증에 대한 긍지는 오늘도 소중히 간직되여있다.조국의 미래를 위해 자기의 량심을 기울여온 애국의 첫 증서로 여겼기때문이였다.
하다면 교육자로서의 그의 열정은 어디에 뿌리를 둔것인가.
리경애동무가 교원생활의 첫발을 내디디던 때는 온 나라가 어려움을 겪던 고난의 시기였다.
생활상곤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가는 교원들도 있었다.
그의 가정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