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 당과 수령을 받든 충신들의 한생에서 : 충성의 한마음으로 온넋을 불태운 진짜배기일군
당과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을 지니고 조국과 혁명을 위한 길에 뚜렷한 삶의 자욱을 새긴 수많은 충신들가운데는 우리 나라 기록영화제작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긴 신윤선동지도 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새 세대들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하였던 전세대들처럼 한생을 빛나게 살도록 교양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속에 30대에 재능있는 기록영화촬영가로 자라난 신윤선동지.
불같은 정열과 남다른 일욕심으로 하여 영화부문에서 《욕심쟁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운 그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재능있는 촬영가였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령도자를 받드는 충실성에서 남다른 사람이라고 평가해야 더 정확할것이다.
1970년대초 신윤선동지가 기록영화부문에서 사업하던 나날에 가슴속에 안고있은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력사적인 혁명활동을 화면으로 기록하지 못하는 문제였다.
한없이 겸허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자신께서 현지지도를 나가실 때 촬영가들이 따라나서는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시였으며 어쩌다 기회가 생겨 촬영가들이 그이앞에 나서면 촬영을 하지 못하게 엄격히 막으시였다.
그러다나니 그이의 혁명활동을 화면으로 남기는 일은 좀처럼 성사되지 못하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활동을 수록하는 력사적과제를 미룬다는것은 우리 인민과 후대들앞에 만회할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는것으로 된다.)
이것이 당시 신윤선동지의 가슴속에 납덩이처럼 들어앉은 고민이였다.
그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느끼군 한 그는 때늦게나마 위대한 장군님의 혁명력사를 화면에 수록할 결심을 더욱 가다듬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제1차 전국예술인학습경연대회가 진행된다는 소식에 접한 그는 몇몇 촬영가들과 함께 급히 경연대회가 진행되는 장소로 달려갔다.
뜻밖에 나타난 신윤선동지를 알아보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누가 동무들을 여기로 오라고 했는가고 하시며 어서 돌아가라고 하시였다.
하지만 신윤선동지는 무작정 그이의 뒤를 따랐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엄하게 책망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다시 회의장안으로 들어가시였다.
신윤선동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였다.
옆에 서있던 한 젊은 촬영가가 이제는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고 말을 건네였다.
그러자 신윤선동지는 버럭 성을 내며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동무는 여기로 나올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들의 촬영을 수락하실것이라고 생각했소?나는 여기로 나올 때부터 그이께서 수락하지 않으시리라는것을 예견했단 말이요.앞으로도 그이께서는 자신을 촬영하는데 대해서는 절대로 수락하지 않으실거요.》
그리고는 한순간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촬영기를 들고 관람석으로 조용히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시종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경연을 지도하시는 위대한 장군님, 우러르고 또 우러를수록 정말 태양같이 환한 모습이시였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학습경연이 막을 내리고 심사결과에 대한 발표까지 끝나자 위대한 장군님께서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였다.
바로 이때였다.신윤선동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주석단가까이로 다가서더니 촬영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여 위대한 장군님께서 제1차 전국예술인학습경연대회에서 력사적인 연설을 하시는 불멸의 영상이 우리 당력사에 생동한 화면으로 수록되게 되였다.
여느때는 과묵하고 좀처럼 자기 내심을 드러낼줄 모르던 그였지만 이날만은 어린아이가 된듯 흥분된 심정을 감추지 못하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