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상식 : 꾸바의 민족적영웅 호쎄 마르띠

주체112(2023)년 11월 22일 로동신문

 

몬까다병영습격후 반동들에게 체포된 피델 까스뜨로동지가 재판정에서 한 연설 《력사는 나를 무죄로 선포할것이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들은 우리 손에 호쎄 마르띠의 저서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감옥의 검열관들이 이 저서가 위험하다고 인정하였기때문이였다.》

아바나의 가난한 포병하사관가정에서 출생한 호쎄 마르띠(1853-1895)는 어릴 때부터 에스빠냐식민지로 전락된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압제자들에 대한 분노심, 민족적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되였다.특히 노예제도의 페지와 독립을 요구하여 꾸바인민들이 일으킨 봉기는 그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극시 《아브달라》에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전장으로 달려나가 용감히 싸우다 희생되는 주인공 아브달라의 형상을 통하여 압제자들에 대한 꾸바인민의 반항정신을 뚜렷이 표현하였다.극시는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운명의 마지막순간을 보내는 주인공의 뜨거운 애국주의적감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나의 형제들이 신성한 피 흘릴 때

이 시각에도 조국은 우리 힘 믿고

자유를 기다린다

싸우라! 투쟁하라!…

조국을 지켜 싸우다 죽는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냐!

그의 창작활동에 위구를 느낀 식민주의자들은 그를 체포하여 에스빠냐로 끌어갔다.

그곳에서 호쎄 마르띠는 《꾸바의 정치감옥》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론문들을 발표하여 꾸바인민에 대한 에스빠냐통치배들의 가혹한 탄압책동을 신랄히 규탄하였다.

그후 아바나로 돌아온 그는 식민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지하조직결성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지하조직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여 국외로 추방된 그는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특히 그는 정의의 필봉을 들고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을 적극 고무하였다.

1892년에 호쎄 마르띠는 꾸바혁명당을 조직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리였다.

1895년 꾸바로 다시 돌아온 그는 에스빠냐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꾸바인민들의 독립전쟁을 지휘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쎄 마르띠는 그야말로 《실천의 시인》이였다.

그의 시는 잉크로 쓴것이 아니라 피로 쓴것이나 같다.

《나의 시는 상처에서 솟구치는 피의 분수와도 같다.》고 한 그자신의 말처럼 뜨거운 조국애와 격조높은 호소로 충만된 호쎄 마르띠의 시작품들은 꾸바인민의 민족해방투쟁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꾸바혁명문학의 초석을 이루게 되였다.

혁명승리후 꾸바인민은 호쎄 마르띠의 동상을 건립하고 공화국의 최고훈장으로서 《호쎄 마르띠훈장》을 제정하였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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