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우리 집을 이런 참된 공민들이 떠받든다 -특류영예군인의 안해가 되여 30여년세월 불같은 헌신과 애국의 길을 걸어온 회안청년탄광 부원 김춘화동무에 대한 이야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신년사를 높이 받들고 온 나라 인민이 공화국공민의 본분을 가슴깊이 새기며 새해진군길을 다그치고있는 오늘 우리는 한생을 불사신처럼 살아온 한 녀성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그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이며 두 아들을 조국보위초소에 세운 인민군대후방가족인 동시에 당중앙의 불빛, 사회주의불빛을 지켜선 북창의 탄부들이 존경하며 사랑하는 성실한 후방일군이고 수많은 병사들이 어머니라 부르는 원군미풍열성자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당과 수령을 위하여, 고마운 사회주의조국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투쟁하는것은 공민으로서의 법적의무이기 전에 량심과 의리로 되여야 합니다.》
녀성으로서, 공민으로서, 당원으로서 당과 조국, 사회와 가정앞에 지닌 의무를 다하기 위해 무거운 짐을 스스로 떠안고 굴함없는 생을 이어온 북창지구청년탄광련합기업소 회안청년탄광 로동보호물자공급과 부원 김춘화동무,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 마련해주신 사회주의 우리 집을 열화같은 애국헌신으로 떠받드는 이 땅의 하많은 식솔들의 순결무구한 아름다움이 그의 모습에 어려있다.과연 어떤 사람이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과 정의 화원, 인민이 대대로 만복을 누려갈 사회주의 우리 집의 한식솔이라고 떳떳이 말할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그가 걸어온 인생의 자욱자욱에서 울려나온다.
나의 초소, 나의 가정
지금으로부터 34년전인 1985년 3월 김춘화동무는 특류영예군인 손재철동무와 가정을 이루었다.
얼마후 그는 당중앙위원회의 부름을 받았다.나라의 방방곡곡에 사는 특류영예군인의 안해들이 그와 나란히 당중앙위원회 뜨락에 들어섰다.그중에서 제일 애젊은 새각시, 여직껏 군당위원회마당에도 별로 들어서본적 없는 24살의 김춘화동무는 높뛰는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따사로운 태양의 빛발이 온몸을 감싸안는듯 한 당중앙위원회 구내길을 꿈속인양 걸어갔다.
그들을 마중한 사람은 당중앙위원회의 책임일군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특류영예군인들과 가정을 이루고 그들의 건강을 지성껏 돌보아주며 자식들도 잘 키우고있는 동무들의 소행을 보고받으시고 은정어린 선물을 안겨주도록 하시였습니다.》
창문가로 흘러드는 눈부신 해살에 유난히 빛을 뿜는 록음기, 라지오가 달린 전축이 어깨를 들먹이기 시작한 녀인들의 가슴마다에 안겨졌다.
정말 기특한 소행이라고, 인민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하시면서 당중앙의 명의로 사랑의 선물을 마련하도록 하신 위대한 수령님, 특류영예군인들가운데는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텔레비죤보다 소리방송과 음악을 다 들을수 있는 전축이 더 좋을것이라고 하시며 영예군인가정들에 안겨줄 선물을 친히 선정하여 당중앙위원회청사에서 수여하도록 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하늘같은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영예군인의 안해들은 격정의 눈물을 쏟았다.
김춘화동무의 고향은 강선이다.국가과학원 흑색금속연구소 실험공으로 일한 그는 두해전 가을 녕원군에 시료채취작업을 나갔다가 그곳의 한 녀인으로부터 최전연초소에서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의 일로 두눈과 두팔, 한다리를 잃고 영예군인이 되여 돌아온 녀인의 사촌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내가 한번 찾아가봐도 될가요?》
검은 안경을 끼고 입가에 미소를 담은 영예군인청년의 사진을 보다가 무심결에 한마디 하였는데 녀인은 몹시 반가와했다.종이장에 북창군의 회안탄광(당시)지구에 사는 사촌동생의 집주소도 적어주고 략도까지 그려주었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