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예술로 수령을 받들고 혁명을 보위한 참된 문예전사 -만수대예술단 고문이였던 박영순동지의 한생을 더듬어-
노래와 함께 승리하며 전진하여온 우리 혁명의 로정에는 천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포성으로 수령을 옹위하고 혁명을 보위한 참된 문예전사들의 자욱이 뚜렷이 새겨져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창작가, 예술인들은 명작창작으로 수령을 옹위하고 혁명을 보위하며 당의 척후대, 나팔수로 복무해온 전세대 문예전사들의 투쟁전통을 이어받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우리 당을 앞장에서 받들어나가는 사상전선의 기수가 되여야 합니다.》
당의 기초축성시기부터 위대한 장군님을 일편단심 충심으로 받들며 인민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로, 당의 참된 문예전사로 성장한 박영순동지,
위대한 장군님의 천출위인상에 매혹되여 끝없는 숭배심으로 가슴을 불태운 그는 1970년대에 위인칭송의 노래를 선창한 선구자들중의 한사람이였고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핵으로 하는 만수대정신의 창조자의 한사람이였다.
재능있는 예술인이기 전에 수령께 무한히 충실한 혁명전사였던 그의 한생은 혁명위업에 참답게 이바지하는 문학예술은 충성으로 불타는 심장을 지닐 때에만 창조할수 있다는 고귀한 진리를 후대들의 가슴마다에 새겨주고있다.
충성의 노래를 낳은 샘
참다운 충실성은 수령에 대한 한없는 매혹과 흠모로부터 시작된다.
수령의 위대성을 심장으로 절감하며 온넋을 바쳐 우러러따르는 마음,
그 숭고한 세계에서 충신의 첫걸음이 시작되는것이며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함을 모르는 일편단심이 량심으로, 도덕의리로, 신념으로 다져지는것이다.
위대한 장군님의 천재적인 예지와 걸출한 령도에 의하여 20세기 문예부흥의 려명이 밝아오던 1960년대의 마지막해,
국립가무단(당시)의 성악배우였던 박영순동지는 만수대예술단의 전신인 국가중창단의 한 성원으로 선발되게 되였다.
당시 국가중창단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우리의 문학예술을 대표하는 예술단체, 본보기단체를 조직하실 구상을 안으신 위대한 장군님의 손길아래 태여난 전도양양한 예술단체였다.
주체58(1969)년 10월 6일 국가중창단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친히 박영순동지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남성중창조의 조장으로 임명해주시였다.
절세위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주체음악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보람찬 길을 걷게 된 박영순동지의 감격과 환희는 그 무엇에도 비길데 없었다.
비범한 예지와 특출한 음악실력, 만사람의 마음을 한순간에 끌어당기는 친화력과 전사들에 대한 불같은 사랑…
위대한 장군님의 걸출한 위인상은 박영순동지의 심장을 열화같은 매혹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거의 매일이다싶이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그이의 지도를 받군 한 박영순동지였으나 그이곁을 하루라도 떨어지게 되면 북받치는 그리움으로 가슴적시며 뵙고싶은 마음을 달랠길 없어하였다.
1970년대 중엽 만수대예술단의 창작가, 예술인들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 대한 방문공연을 진행할 때였다.
공연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꽃다발속에 묻혀있을 때에도, 깊은 밤 이국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에도 박영순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눈앞에 어려오고 그이의 가르치심이 귀전에 들려오군 했다.
정다운 그 품으로 천리이든 만리이든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고싶을 때마다 머나먼 조국의 하늘가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라고 불러보던 박영순동지였다.
그는 매일과 같이 위대한 장군님께 마음속진정을 아뢰이며 이런 글줄을 이어갔다.
《1974.10.28.월요일.알제리에서 첫 관통련습.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오늘 저희들은 알제리의 지방도시인 오랑에서 첫 무대관통련습을 진행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에서 볼 때 미숙한 점이 많았습니다.특히 리듬이 불안하며 전반적음색통일이 잘되지 않고있는것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심려를 덜어드리는것을 제일가는 기쁨으로 여기고있는 저희들은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에서 한치의 드팀도, 자그마한 양보도 없을것이며 알제리에서의 첫 공연을 높은 사상예술적수준에서 보장함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충성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외국방문공연의 나날 그는 남성중창조 성원들에게 《우리의 임무는 첫째도 둘째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세워주신 기준을 고수하는것이요.》라고 강조하군 하였다.일상생활에서도 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라고 하셨는데》라는 말을 자주 하군 하였던 박영순동지는 사업일지나 일기의 구절마다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주신 교시를 인용하고 거기에 자기의 사업과 생활을 비추어보군 하였다.
이런 그였기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일단 형상과제를 주시기만 하면 폭발적인 열정과 지칠줄 모르는 탐구와 사색을 기울여 훌륭히 수행해내군 하였고 자신뿐아니라 남성중창조의 모든 성원들을 그렇게 이끌었다.
그 나날 박영순동지의 가슴속에는 하나의 절절한 소원이 자리잡았다. 령도자로서, 인간으로서 만사람의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그이의 위대함을 소리높이 노래하고싶은 억제할수 없는 충동이였다.
절세위인의 품속에서 성장의 걸음마를 떼던 순간부터 심장에 끓는 매혹과 흠모의 불덩이를 세상에 터치고싶은 열망은 자나깨나 그의 심신을 달아오르게 하였다.
1970년대는 위대한 장군님의 출중한 위인상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이 감득하게 된 문예전사들의 충성의 열정이 위인칭송의 노래로 분출하여 온 나라를 울린 격동의 년대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노을이 피여나는 이른아침에 인자하신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라는 노래의 구절을 뜨거운 감회와 격정속에 부르군 한다. 위대한 장군님을 처음으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로 높이 칭송한 가요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가 문학예술부문 창작가, 예술인들의 집체작으로 태여나 온 나라를 감격과 흥분에 휩싸이게 한 그 시기에 박영순동지도 열렬한 칭송의 붓을 들었다.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 32돐을 맞는 주체63(1974)년 2월의 명절을 맞으며 그가 가사를 쓴 노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영광을 드립니다》가 훌륭히 형상되여 무대에 올랐다.중요한 국가행사보장을 위한 공연준비로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무대와 련습실에서 보내고 밤시간마저도 자질향상과 안삼블훈련으로 지새는적이 많은 그가 언제 그렇듯 훌륭한 가사를 완성해냈는지 누구나 놀라와했다.
늘 봐야 말이 적고 일밖에 모르는 그였지만 가슴속에는 그렇듯 용암처럼 뜨거운것이 끓어번지고있었다.
주체68(1979)년 2월 17일 만수대예술극장에서는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2월의 명절을 경축하는 공연이 진행되였다.이날의 공연무대에 박영순동지가 가사를 지은 노래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가 합창으로 오르게 되였다.합창이 끝나자마자 박영순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무대에서 달려내려온 그가 올리는 인사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뜸 동무가 쓴 《2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의 가사를 《4월의 명절을 축하합니다》로 고치라고 이르시는것이였다.무대와 객석이 통채로 긴장되여 박영순동지를 지켜보고있는 속에 그는 장군님께 이 노래는 박영순이 쓴 노래가 아니고 인민의 마음으로 쓴 노래이기때문에 고칠수 없습니다라고 가사를 그대로 둘것을 간청드렸다.억지를 부리다싶이 하는 전사를 바라보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엄하신 음성으로 동무들이 내 말이라면 담벽이 문이라고 하여도 그냥 밀고나가겠다고 맹세하더니 왜 나의 말을 듣지 않는가고 하시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