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 백두산에서 만난 사람들 -사시장철 혁명의 성지를 지켜가는 애국자들을 찾아서-

주체112(2023)년 3월 23일 로동신문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위대한 정신과 고귀한 전통이 뿌리내린 혁명의 성산인 동시에 공화국의 영광스러운 75성상을 떠받들어온 조선인민의 애국심의 상징과도 같은 애국의 성산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애국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이고 투신입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성지, 조선의 제일 높고 성스러운 이곳에도 일터와 초소들이 있고 그를 지키는 성실한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사시장철 거의나 녹지 않는 눈과 산짐승도 휘감아내치는 사나운 칼바람, 가도가도 끝이 없을상싶은 중중첩첩의 산과 봉우리들, 천연수림의 바다가 펼쳐진 이 고산지대에 삶의 터전을 정하고 백두산을 지켜 한생을 보내고있는가.

그들을 찾아 우리는 백두산지구로 떠났다.

 

이 나라의 제일 높고 성스러운 초소에서

 

백두산정점에서의 0시였다.

조국의 새날이 시작되는 그 시각에 우리는 백두산기상관측소에 있었다.창밖에서는 눈가루를 휘말아올리는 백두산특유의 칼바람이 우- 우- 울부짖고있었다.

평양을 떠나 렬차를 타고 천여리, 백설덮인 북방의 길을 따라 뻐스를 타고 수백리를 달린 우리는 칼바람을 맞받아헤치며 수십리를 행군하여 전날 17시경에야 여기 백두산기상관측소에 올라오게 되였다.

장군봉밑에 있는 백두산기상관측소는 천지로부터 불과 수십m거리에 자리잡고있다.이 관측소는 공화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일터이다.

백두산에로의 답사행군길에서 이 정점에 올라와 만세를 부르던 추억을 안고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바로 여기에 기상관측소가 있으며 그 자그마한 건물을 집삼아 살며 일하고있는 애국자들이 있다는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관측소로 올라오는 그 험하고 바람세찬 길에서 벌써 우리에게는 여기 사람들이야말로 애국자중의 애국자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0시가 되자 콤퓨터에 기상관측자료를 기입하던 소장 안영남동무가 밖에 나설 차비를 하며 일어섰다.우리도 함께 자리를 일었다.기상관측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싶었던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향한 관측실의 출입문을 여니 곧 다른 문이 나졌다.그 문을 열자 으쓸한 추위가 느껴지면서 세번째 문이 보였다.세번째 문을 열자 안영남동무가 비치는 동그란 전지불빛에 하얀 서리가 두텁게 낀 마지막 네번째 문이 드러났다.네번째 문을 여니 이번에는 눈굴이 기다리고있었다.관측소입구와 밖을 련결하는 이 눈굴은 마당에 키가 넘게 쌓인 눈속에 굴을 뚫어 사람이 다닐수 있게 낸 통로였다.

우리는 전날에 관측소에 들어설 때처럼 그 출입문들과 눈굴을 지나며 백두산의 기후가 얼마나 엄혹한가를 절감하게 되였다.

밖에 나서니 고막을 찢을듯한 바람소리와 함께 칼바람에 휘말려날아오는 눈가루가 바늘끝처럼 볼을 찔렀다.순식간에 웃속눈섭과 아래속눈섭이 얼어 맞붙는통에 눈조차 뜨기 어려웠다.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가슴은 마냥 흥분으로 높뛰였다.

각종 기상관측기재들이 설치된 관측장에 올라서니 장엄함과 기묘함, 신령스러운 정기를 안고 억만산악을 거느린 백두산의 륜곽이 희푸른 채광을 발산하듯 안겨왔다.손을 뻗치면 령험스러운 자태를 드러낸 천지의 벼랑들과 바위들을 잡을듯싶었다.

안영남동무는 관측기재들의 동작상태를 관찰하며 조용히 뇌이였다.

《기온은 령하 23℃, 북서풍, 바람속도 9m/s…》

그의 말에 의하면 현대적인 기상관측기재가 있어 얼마든지 관측실에 앉아 관측을 할수 있지만 반드시 한시간에 한번씩 밖에 나와 구름상태도 확인하고 바람속도도 가늠하면서 일기를 관측하는것은 어길수 없는 공정이라고 한다.이런 엄혹한 환경에서는 현대적인 기재도 추위와 바람에 못견딜 때가 있는것이다.

이런데서 기상관측이 정말 조련치 않겠다는 우리의 말에 안영남동무는 입김을 백발수염처럼 날리며 웃었다.

《이 백두산을 보는 멋에 여기서 일하지요.》

장엄한 교향악마냥 들려오는 칼바람소리, 대자연의 정교함이 다 모인듯한 천지의 절벽… 류다른 백두산의 정취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관측실에 들어서니 침실에서 자던 두 젊은이가 언제 일어났는지 콤퓨터앞에 앉아있었다.근무시간이 되였던것이다.

키가 후리후리한 청년이 김이 문문 오르는 물을 우리에게 권했다.전날 저녁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그는 이 물을 권했었다.그때 그는 고뿌에 뜨거운 물을 따라주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드십시오.백두산눈을 녹여 끓인 물입니다.》

그 고뿌를 받아쥐는 순간 코허리가 시큰해졌다.

빨찌산투사들에게는 생명수의 원천이였고 포근한 《이불》이였으며 기근을 달래는 《량식》이기도 하였던 백두산의 눈, 그 눈을 녹인 맑은 물은 백두산기상관측소에 배치되여 첫 출근을 하는 관측원들과 우리와 같은 손님들에게 부어주는 이 집 주인들의 각근한 례의의 표시였다.

우리는 백두산의 눈을 녹인 그 물을 또다시 류다른 흥분을 안고 마시였다.불처럼 뜨거운것이, 청신하고 감미로운 백두산의 생명수가 목젖을, 페부를, 심장을 후덥게 적셔주었다.

우리에게 물을 부어준 청년은 안영남동무의 아들인 안현명동무였다.안영남동무는 대견한 눈길로 그를 여겨보았다.

《저 애는 재작년에 인민군대에서 제대됐습니다.솔직히 편안한 일자리도 많았지만 전 그런 곳에 아들을 세울수 없었습니다.그래서 해당 부문 일군들을 찾아가 제기했지요.백두산을 지킬 로력이 필요하니 내 아들을 보내달라, 백두산에 태를 묻은 제대군인이라면 응당 백두산기상관측소에서 한생을 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백두산바람에 다스려진 그의 철빛얼굴에는 아들과 함께 영예로운 초소를 지켜섰다는 긍지가 한껏 어려있었다.

안영남동무는 아들의 옆에 앉아 콤퓨터로 프로그람을 짜고있는 한 청년을 가리키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두산을 지키고있는 정은호동무라고 소개하였다.

정은호동무는 기상관측을 보다 과학적으로 하기 위한 프로그람을 개발하고있다고 하면서 백두산기상관측소를 기상관측에서 가장 앞선 단위로 만드는것이 자기의 꿈이라고 했다.

문득 콤퓨터옆에 놓인 전화기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정은호동무는 송수화기를 들고 《예, 여기는 백두산입니다.》라고 응수했다.백두산답사를 떠나려는 어느한 단체의 일군에게 오늘 날씨는 개일것이라고 대답하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류다른 충격속에 보게 되였다.

《여기는 백두산입니다.》

마치 고향집구들에 앉아 전화를 받고있는듯한 그 목소리에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을 진정한 행복의 주소, 보람찬 삶의 보금자리로 여기는 애국자들의 긍지와 자부가 얼마나 자랑스럽게 꽉 차있는것인가.

관측원들인 원권혁, 임철민, 한진성, 최창호동무들…

손전화기와 콤퓨터의 배경화면도 백두산의 전경으로 설정한 이들, 사랑하는 부모처자와 친근한 벗들과의 교제도 《여기는 백두산입니다.》라는 떳떳한 말로 시작하는 이들이야말로 백두산을 심장속에 꽉 채운 돋보이는 인격자들인것이다.

어느덧 해돋이시간이 되였다.관측소를 나선 우리는 장군봉으로 올랐다.

여름철에는 대체로 새벽 5시 30분경에 떠오른다는 태양이 이 아침에는 6시 20분경 멀리 대홍단쪽상공에서 불덩어리처럼 이글거리는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칼바람에 깎이여 물결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산정의 눈들도 붉게 물들고 《혁명의 성산 백두산 김정일이라는 위대한 장군님의 불멸의 친필글발이 모셔진 향도봉도 불그레한 빛에 싸여 숭엄하게 안겨왔다.천지의 깎아지른듯한 벼랑들에 희끗희끗 쌓였던 눈들이 얼어붙은 호수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타고 장군봉까지 회오리쳐와 노을빛에 물들어 홍보석가루마냥 부서지고있었다.

옷자락을 찢을듯 맹렬히 불어치는 바람을 타고 처녀들의 랑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향도봉에서부터 장군봉으로 이르는 길에 쌓인 눈을 쳐내고있는 백두산혁명전적지관리소 강사들이였다.고향의 따스한 보금자리와 꽃향기 넘치는 공원도 뒤에 두고 칼바람 세찬 백두산정에서 처녀시절을 보내는 그들은 얼마나 강의하고 아름답고 랑만적인 처녀들인가.

《우리들보다 저 삭도관리소사람들이 더 수고합니다.》

강사인 서신향동무가 향도봉기슭의 삭도관리소건물을 가리켰다.그가 가리켜준 곳에 이르니 털모자를 쓴 두 사람이 발을 탕탕 구르며 신발에 묻은 눈을 털고있었다.백두산혁명전적지삭도관리소 전기작업반 반장 한상길동무와 삭도운전지휘원 최광혁동무였다.그들은 방금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로선에 이상이 없는가를 알아보고 올라온 길이였다.

한상길동무는 1995년 9월부터 현재까지 백두산혁명전적지삭도관리소에서 일해오고있었다.

《전 백두산의 삭도들에 대한 전력공급을 책임졌습니다.》

이렇게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제인가 폭설로 백두산으로 오르는 길이 막혔을 때였다고 한다.눈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전력선이 끊어지고 전주대가 불과 50cm 되나마나하게 보일 정도였다는것이다.

한상길동무를 비롯한 전공들은 수리할 구간을 찾아 가슴으로 눈을 밀며 한치한치 길을 열었다.한사람이 그렇게 10m 전진하면 다음사람이 또다시 온몸을 내대고 눈을 밀며 10m 전진했다.옷은 땀에 젖고 눈에 젖었다.허나 그들은 잠시도 주춤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상길동무에게서 어느해 겨울 한 구간에서 끊어진 전기케블을 수리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그날은 어찌도 추웠던지 물방울을 떨구면 그대로 얼음알갱이가 되여 떨어지는 날이였다고 한다.

삭도관리소 전공들이 케블수리를 한다는것을 안 군인들이며 기상관측소 관측원들은 약속이나 한듯 모포를 들고 달려나왔다.그리고는 뼈속까지 얼어드는 혹한속에서 모포를 활짝 펴고 바람막이가 되여 전공들을 빙 둘러막았다.한상길동무를 비롯한 전공들은 뜨거운것을 삼키며, 《적기가》를 부르며 케블수리를 해냈다고 한다.

《어쩌다 집에 오면 안해는 저를 두고 〈합숙생〉이라고 한답니다.진짜 집은 백두산이라는거지요.》

이것은 최광혁동무의 말이였다.

그의 집이 있는 신무성동에서부터 백두산까지는 수십리길이다.그는 6월부터 10월까지 삭도를 운영하고 겨울철에는 백두산에 올라와 삭도를 관리하느라 한해치고 집에 있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백두산을 떠나선 정말 못살것같습니다.우리야 백두산을 지키는 초병들이 아닙니까.》

20여년간 이 성산에서 깨끗한 량심을 바쳐온 그는 흰눈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그레 웃었다.

우리의 눈굽은 후더워졌다.

백두산초병!

이는 오직 혁명의 성산에만 있는 가장 영예로운 직업이며 그 어떤 명예나 억만금에도 비길수 없는, 백두산이 자기의 참된 복무자들에게만 안겨주는 제일로 값높은 표창이고 영예가 아니겠는가.

최광혁동무와 같은 참된 백두산초병들중에는 백두산혁명전적지삭도관리소에서 일하는 량만수, 김광학, 심영호, 최혁철, 림성호, 김수련동무도 있다.

귀뿌리를 도려내는듯한 광풍이 천지에서 사납게 울부짖으며 기승을 부렸다.뽀얀 눈가루가 회리치며 날아올라 하늘을 덮어버리고 해도 얼어붙은듯 뿌옇게 빛을 잃었다.하지만 우리의 가슴에는 뼈를 에인다는 칼바람이 봄바람처럼 훈훈하게 흘러드는것만 같았다.

 

빨찌산정신으로 이어가는 삶

 

백두산을 내린 우리는 백두산밀영으로 향했다.혁명의 성지를 관리하고있는 애국자들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소백수골에 이르니 분비나무며 종비나무에 쌓였던 눈들이 바람에 백화마냥 화르르 날렸다.그 눈꽃을 맞으며 백두산밀영으로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비자루와 눈가래를 들고 정성껏 길을 관리하고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였다.백두산밀영을 관리하고있는 사람들이였다.

우리는 그들속에서 관리소일군인 전승철동무를 만났다.그의 말에 의하면 이곳 관리원들은 하늘을 보며 출근하고 하늘을 보며 퇴근한다고 한다.날이 조금이라도 흐리면 눈이 올것같아 퇴근길에 오르지 못한다는 이들, 깊은 밤 집에 와서도 몇번씩 밖에 나와 날씨를 가늠한다는 사람들이다.이곳 관리원들의 집이 있는 백두산밀영동에서부터 백두산밀영까지는 10리길이다.하지만 폭설이 내리면 새벽 2시, 3시라 할지라도 관리원들의 가족들까지 백두산밀영으로 달려나와 눈을 쳐낸다고 한다.

전승철동무는 관리소에는 부모들의 뒤를 이어 혁명의 성지를 지키는 동무들도 있다고 하면서 정일봉에서 일하는 김철준동무도 그중의 한명이라고 했다.

김철준동무의 아버지 김명철로인은 수도 평양에서 살다가 젊은 시절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로 탄원해왔으며 조선의 제일봉에서 일하는 첫 관리원이 되였다.그리고 오늘은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우리는 전승철동무와 함께 김철준동무를 찾아 정일봉으로 향했다.

경사가 어찌도 급한지 지지바줄이 나무와 나무사이에 늘어져있어 한손으로 그것을 잡고 다른 팔로는 눈에 묻힌 나무밑둥을 그러안으며 올라야만 했다.무거운 발을 눈속에서 뽑으며 한치한치 오르자니 숨이 가쁘고 목에서는 겨불내가 났다.잠간사이에 이마에는 땀이 흥건히 내돋았다.

우를 쳐다보니 전승철동무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싱긋이 웃고있었다.그는 쇠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힘있게 노래를 불렀다.

설한풍이 휩쓰는 험한 산중에

결심품고 싸워가는 우리 혁명군

우리도 목소리를 합쳤다.

절벽에 고정된 사다리를 타고 높이도 오른 한 사람이 《정일봉》이라는 불멸의 글발이 새겨진 봉우리에서 일하고있는것이 보였다.그가 바로 김철준동무였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해발고가 1 798m인 정일봉에 올라 순결한 애국충정을 바쳐가고있는 그였다.

전승철동무는 그를 두고 정말 쉽지 않은 사람이라고, 어느해 여름날에는 관리사업을 위해 그가 물통을 지고 9번이나 정일봉에 올랐던적도 있다고 하였다.

이윽고 우리는 정일봉에서 내려온 김철준동무를 만날수 있었다.

《전 정일봉에 오를 때면 투사들을 생각합니다.》

소박한 말이였지만 우리가 받은 충격은 컸다.

풀뿌리를 씹어삼키면서, 박달나무도 얼어터지는 혹한속에서 한몸이 그대로 방탄벽이 되여 사령부를 옹위한 투사들, 아름드리거목들에 백두광명성이 솟았다는 글발을 새기며 충성의 일편단심을 더욱 굳게 간직한 투사들처럼 그도 백옥같은 마음으로 혁명의 성지를 지키고 빛내이고싶었던것이다.

정일봉에서 일하면서 그는 참된 사랑도 행복도 찾았다.10여년전 군사복무를 마치고 백두산밀영을 관리하는 성스러운 초소에 서게 된 그는 같은 일터에서 일하는 한 처녀를 알게 되였다.

숫눈처럼 살결도 희고 눈매도 아련한 그 처녀는 뭇총각들의 관심속에 떠받들리우다보니 처음에는 김철준동무를 왼눈으로 보았다고 한다.그러나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일봉에서 일하면서부터, 조선의 제일봉에 오르는 사나이답게 호방하고 강직한 그의 인격을 깊이 알게 되면서부터 처녀는 순정의 문을 열었다.결국 성스러운 정일봉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무르익었던것이다.

도시의 청춘들이 맞는 유보도의 싱그러운 강바람이 아니라 백두성지의 눈보라를 맞으며, 꽃향기 진동하는 공원길이 아니라 지지바줄을 잡고 무릎치는 눈을 헤쳐 정일봉으로 오르기도 하며 그들은 가정에 대하여, 행복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다정하게 속삭이였다.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였다.

《우리 온 가족이 백두산밀영을 지키자고 합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가 정일봉에서 일하는것처럼 저희 딸도 혁명의 성지를 꿋꿋이 지켜가게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굽은 뜨거워졌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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