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스러운 과거를 되풀이할수 없다》
《조선사람은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10여년전 첫 조선총독의 감투를 쓰고 우리 나라에 기여들었던 데라우찌가 뇌까린 말이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을 날조한데 기초하여 그해 12월 칙령 제267호로 《통감부 및 리사청관제》를 공포한 일제는 다음해 2월 1일 서울에 정식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이또 히로부미를 초대통감으로 내세웠다. 이후 일제는 식민지파쑈통치체계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1910년 10월 1일 조선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간판을 바꾸고 력사상 류례없는 식민지총독정치를 실시하였으며 첫 조선총독으로 악명높은 데라우찌를 파견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우리 인민의 반일의식을 거세하고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할 목적밑에 헌병경찰제도를 조작해냈으며 그에 기초하여 극악한 중세기적공포정치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범죄즉결령》, 《조선형사령》, 《조선태형령》을 비롯한 각종 살인악법들을 조작하고 이르는 곳마다에 설치한 헌병 및 경찰기구들을 동원하여 법적수속이나 재판도 없이 조선사람들을 마구 처형하였다. 또한 일제의 가증되는 폭압만행에 격분하여 1919년 3월 1일 반일인민봉기에 떨쳐나선 조선사람들을 10여만명이나 무참히 학살하였다.
3. 1인민봉기이후 식민지통치체제의 위기를 느낀 일제는 종래의 《무단통치》의 총검우에 《문화통치》의 비단보자기를 씌워놓고 분노한 반일민심을 눅잦혀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무단통치》가 《문화통치》로 명칭만 바뀌였을뿐 악명높은 총독정치의 진면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달라진것이 있다면 통치수법이 보다 교활하고 악랄해진것뿐이였다.
일제는 1926년 6. 10만세시위투쟁과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한 평화적시위도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조선사람살륙에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840만여명의 조선청장년들을 강제련행, 랍치하여 죽음의 전쟁터와 고역장들에 내몰았으며 그 과정에 피살된 희생자수가 무려 100여만명에 달한다는 사실,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성노예화한 특대형반인륜범죄, 기만적인 《동조동근》, 《내선일체》의 구호를 내들고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행하였으며 나중에는 조선사람의 성과 이름, 말과 글까지 없애버리려고 날뛴 전대미문의 조선민족말살책동 등은 일제의 가혹한 총독정치,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영구화하려고 미쳐날뛴 일제의 과거죄악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력사의 산 증거들이다.
일제가 가장 야만적이며 악독한 식민지총독정치를 실시한 때로부터 1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도 일본반동들은 엄연한 력사적사실들을 외곡하고 부정하다 못해 죄악의 력사를 미화분식해가며 흑백을 전도하고있다.
더우기 군사대국화, 군국주의부활에로 미친듯이 질주하면서 조선반도재침야망실현에 더욱 광분하고있다.
간과할수 없는것은 윤석열괴뢰역적패당이 민족의 천년숙적과 《관계개선》을 한다고 떠들면서 과거 일제의 만고죄악을 덮어버리려 하고있는것이다. 지어 미국의 사촉밑에 《3각군사동맹》구축, 《아시아판 나토》조작에 발벗고 나서면서 일제의 조선반도재침광기에 부채질해주고 침략의 길잡이, 안내자노릇도 서슴지 않고있다. 최근에는 민심과 국제사회의 준절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후꾸시마원자력발전소 핵오염수해양방류책동에 극구 동조해나서고있어 민심의 치솟는 분노를 더욱 격앙시키고있다.
윤석열역도와 같은 친일사대매국노, 토착왜구집단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있기에 일본반동들이 더욱 오만방자해지고 조선반도재침을 위한 파렴치한 망동이 오늘도 계속되고있는것이다.
일본반동들의 뻔뻔스러운 행태와 친일역적무리들의 비굴한 아부굴종을 더이상 용납할수 없기에 괴뢰지역의 민심은 지금 《치욕스러운 과거를 절대로 되풀이할수 없다.》, 《윤석열정권퇴진!》의 구호를 더 높이 터쳐올리고있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