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 조국을 위한 헌신의 길에는 끝이 없다 -모란봉구역도로시설관리소 가로4작업반 반장 리명옥동무에 대한 이야기-

주체110(2021)년 9월 12일 로동신문

 

공화국창건일을 뜻깊게 경축하는 환희의 열기로 끓어번진 김일성광장, 당에 대한 충성의 일편단심을 지니고 조국의 부강번영에 이바지해온 수많은 경축행사참가자들이 자리잡고있던 초대석에는 중앙사회주의애국공로자의 영예를 지닌 모란봉구역도로시설관리소 가로4작업반 반장 리명옥동무도 있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에게는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다 한모습이고 순탄한 길을 걸을 때도 시련에 찬 길을 걸을 때도 언제나 한모습인 그런 충신이 필요합니다.》

특류영예군인의 한생의 길동무가 된 사실 하나만 놓고보아도 리명옥동무는 이 땅의 녀성으로서, 가정주부로서 가장 어렵고 힘겨운 짐을 스스로 걸머지였다고 할수 있다.

그렇듯 헐치 않은 인생행로를 택한것만으로도 그는 사회와 집단의 존경속에 떳떳하게 살아갈수 있었을것이다.

허나 그는 조국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일터에 또다시 자원진출하여 누가 보건말건, 알아주건말건 성실한 땀과 량심을 깡그리 바쳐감으로써 공민으로서도 누구나 쉽게 선택할수 없는 값높은 애국헌신의 삶을 이어가고있다.

향유의 권리우에 보답의 의무를 놓고 남보다 몇곱절로 자신을 바쳐가는 그의 생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두번째 선택

 

《저를 도로관리원으로 받아주십시오.》

어렵고 힘든 초소에 스스로 탄원해나선 녀인의 미덕에 연신 감동을 금치 못하던 모란봉구역도시시설관리소(당시)의 일군은 뜻밖의 충격에 깜짝 놀랐다.그는 다름아닌 특류영예군인의 안해였던것이다.

《영예군인을 돌보는 일만도 헐치 않을텐데…》

선뜻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일군에게 리명옥동무는 절절히 제기하였다.

《우리 수령님들의 발자취가 제일 많이 어려있는 도로를 저에게 꼭 맡겨주십시오.》

그는 과연 어떤 녀성인가.

민족의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정든 수도를 떠나 전야로, 탄전으로, 개발지로 앞을 다투어 탄원하는 청년들의 미거가 시대를 격동시키던 1990년대에 리명옥동무는 한창나이청춘이였다.

당시 월미도체육선수단 선수였던 리명옥동무는 아침마다 거리를 따라 달리기를 하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는 자주 경제선동의 길에 오른 영예군인들과 그의 안해들을 보게 되였다.

어깨에는 기타며 북을 메고 남편의 네바퀴차를 밀어가는 영예군인 안해들의 모습을 바라볼수록 왜서인지 그들이 아득한 높이에 서있는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어졌다.

영예군인의 안해들의 곁에 때없이 자기를 세워보는 리명옥동무의 생각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임무수행중 뜻밖의 부상을 입고 19살 애젊은 나이에 침상에 매인 몸이 되여 근 10년세월을 어머니의 간호속에 산다는 한 특류영예군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만 되새겨졌다.

그에게도 일생을 같이할 안해가 있어야 할것이 아닌가.

그날부터 리명옥동무는 밤마다 간호학에 대한 책을 파고들었다.얼마후부터는 남모르게 주사놓는 법도 익혀나갔다.

그가 모란봉구역 개선동에 사는 영예군인의 집을 찾은것은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나서였다.

뜻밖에 인물 훤하고 성격이 서글서글한 처녀가 자기 집에까지 찾아온 사연을 알게 된 조금철동무의 어머니는 목이 꽉 메여올랐다.

첫눈에도 정이 푹 드는 처녀를 듬쑥 안아 며느리로 맞이하고싶은 마음이 강렬할수록 그 청혼을 받아들일수 없는 어머니의 심정은 자못 강경했다.

《쉽게 결심말고 내 아들의 병상태를 제일 잘 아는 병사시절의 간호원을 먼저 만나보오.》

그렇다고 문밖에서 쉬이 돌아서랴.끝내 어머니를 앞세우고 영예군인 조금철동무의 침상앞에 섰을 때 리명옥동무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하반신이 마비된 영예군인은 손이라도 제대로 쓸수 있지만 그는 두팔도 두다리도 없는것과 다름이 없는, 오직 머리 하나만 살아있다고 말할수 있는 전신마비의 영예군인이였던것이다.

그 걸음으로 그는 조금철동무의 병사시절 간호원을 찾아갔다.

그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어제날의 간호원은 말했다.

《한순간의 충동이나 동정만으로는 그와 살수 없어요.단념하세요.》

누구보다 자기를 지지해줄줄 알았던 간호원이였다.

리명옥동무는 그만 참았던 말을 하고야말았다.자기 전우의 운명에 그렇게 랭담할수 있는가고.

순간 웃방문이 벌컥 열렸다.그의 남편의 모습을 본 리명옥동무는 얼굴을 들수 없었다.간호원, 그 역시 영예군인의 안해였던것이다.

끝까지 가지 못하고 물러서거나 되돌아선다면 그것은 영예군인에게 두벌아픔을 주는 길이라던 그의 이야기를 곱씹어 새겨보는 리명옥동무에게는 조금철동무의 어머니가 묻던 말이 그냥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왜 굳이 우리 아들처럼 병상태가 심한 영예군인과 살려고 결심했소?》

그랬다.누가 말했듯이 고생을 사서 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버이장군님의 어깨우에 실린 무거운 짐을 덜어드리는 진짜배기효녀가 되겠다고 피눈물의 맹세를 다진 그날부터 늘 간직하고 사는 남다른 지향이 있었다.

땀을 흘려도 남보다 더 많이, 짐을 져도 남보다 더 무겁게!

하기에 우리 당이 각별히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영예군인들, 그들중에서도 손길이 많이 가고 돌보는 품이 많이 드는 영예군인의 혁명동지가 되여 나라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싶은것은 그의 솔직한 심정이였다.

영예군인의 상처의 경중을 가려가며 일생을 같이할 결심을 했다면 그것이 무슨 진심이랴.

영예군인을 찾는 그의 걸음은 더욱 잦아졌다.그럴수록 제 아들을 위해 남의 집 귀한 딸의 행복을 희생시킬수 없다는 조금철동무 어머니의 마음은 더욱 완고해졌다.

《막내딸이라지.우리 아들과 살면 한생 고생을 지고 살거네.》

《이 땅에 금철동지의 안해가 될 처녀들은 얼마든지 있을것입니다.하다면 누구든 하게 될 그 고생을 제가 도맡으면 안되겠습니까.》

영예군인의 어머니는 끝내 처녀앞에서 눈물의 동을 터치고야말았다.

공화국창건 50돐이 되던 해 꽃피는 봄, 만사람의 축복속에 새 가정을 이루던 그날 리명옥동무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감사와 선물을 받아안았다.

그날 리명옥동무는 맹세했다.

《남편과 함께 혁명의 꽃을 계속 피워나가며 사회와 집단을 위해 더 많은 일을 찾아하겠습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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