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 애국은 심장으로 한다 -화대광산 자력갱 갱장 공훈광부 박영복동무에 대한 이야기-
불굴의 인간, 참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인가.
당과 조국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깡그리 바쳐가는 사회주의애국공로자인 화대광산 자력갱 갱장 박영복동무에 대한 이야기가 그에 훌륭한 대답을 주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모든 일군들과 당원들과 근로자들은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앞에 지닌 숭고한 사명감을 깊이 자각하고 김정일애국주의를 높이 발휘하여 자기 초소, 자기 일터에서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부강조국건설에 이바지하여야 합니다.》
박영복동무는 수십년을 막장에서 일하면서 로동자로부터 소대장, 중대장을 거쳐 갱장으로 사업하는 나날에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하여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
뜻밖의 일로 두다리를 상하고 한눈을 실명당한 불편한 몸으로 변함없이 막장을 지켜온 공훈광부,
심장의 박동이 다할 때까지 온넋으로 당과 조국을 받들려는 충성과 애국의 일념 안고 생의 한초한초를 불사신처럼 이어온 그의 삶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값높고 보람있는 인생이란 과연 어떤것인가를 새겨주고있다.
지하막장의 불사조
지금으로부터 13년전 2월 어느날 박영복동무는 여느날과 다름없이 갱에서 일하고있었다.
광부들과 함께 발파준비를 다그치던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갱벽을 주시했다.순간 그의 눈에서 섬광같은것이 번뜩이였다.분초를 다투는 위험이 다가오고있었던것이다.그는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함께 일하던 광부들을 힘껏 밀어던졌다.뒤따라 갱안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영복동무는 의식을 잃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할무렵 의사는 그에게 힘든 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당부했다.그에 대한 의학적진단은 명백히 로동능력상실이였던것이다.광산에서는 사회보장수속문건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하지만 박영복동무는 자기에게 내려진 의학적진단을 완강히 거부했다.자기가 어떻게 되여 보람있는 생을 살게 되였는가를 돌이켜볼수록 그 생을 변함없이 이어가려는 결심이 그의 심신을 꽉 틀어잡았던것이다.
그는 한때 사람들의 속을 무던히도 태웠다.낳아준 어머니마저 단념하였던 《말썽꾸러기》를 꾸준히 교양하고 이끌어 인생의 새 출발선에 세워준것은 광산당조직이였다.
때로는 아픈 매도 들면서 걸음걸음 보살펴주고 재생의 길을 걷는 그를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며 보란듯이 내세워주고 혁신자로 떠받들어주던 그 손길, 그 품이 너무도 고맙고 소중했기에 박영복동무는 정녕 일터를 떠날수 없었다.
광산에서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쉬염쉬염 일하겠다는 그의 확답을 몇번이나 받아내고서야 갱안에 들어가는것을 허락했다.
막장일은 많은 육체적소모를 요구한다.평지길도 제대로 걷기 어렵게 된 다리를 가지고 한눈을 실명당한 상태에서 막장길을 하루와 같이 이어간다는것은 그야말로 헐치 않은 일이였다.
허나 그에게는 막장을 떠받들고있는 동발목처럼 든든히 뻗쳐주는 마음의 기둥이 있었다.그것은 바른길로만 멈춤없이 곧바로, 끝까지 걸어가라고 떠밀어주는 당의 믿음이였다.죽어도 그 믿음만은 베고죽겠다는 각오로 심장을 끓이였기에 박영복동무는 형언할수 없는 육체적고통을 강인한 의지로 이겨내며 막장길을 이어갔다.
불편한 다리로 걷는 자기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걱정할것같아 그는 먼동이 터오는 이른새벽에 출근길에 올랐고 교대가 끝난 다음에도 인적이 뜸해진 한밤에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불편한 몸을 갱작업에 적응시키기 위해 남모르게 고심하면서 남들과 꼭같이 착암과 발파, 광석운반과 버럭처리를 하였다.
광부들이 그렇게 일하다가는 몸의 기력은 물론 땀마저 바닥이 나겠다고 걱정할 때마다 박영복동무는 웃으며 말하였다.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조국을 위해 흘릴 땀이 없으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같습니다.》
당과 조국을 위하여 흘리는 땀, 그것이야말로 박영복동무의 가슴속에 끓고있는 보답의 열정이였다.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니고 소대장을 거쳐 중대장이 된 박영복동무는 당앞에 다진 엄숙한 맹세를 지켜 한몸을 아끼지 않았다.
당 제7차대회를 앞두고 충성의 70일전투가 시작되였을 때였다.70일전투의 앞장에서 본때있게 내달릴 열의로 가슴을 끓이며 갱으로 달려나왔던 광부들은 작업준비를 하고있는 박영복동무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며칠전에 병이 악화되여 병원으로 실려갔던 사람이 어떻게 갱에 있는가.
광부들은 그의 설명을 듣지 않고서도 능히 짐작할수 있었다.뜻깊은 당대회를 보위하기 위한 투쟁의 앞장에는 응당 당원이며 지휘관인 자기가 서있어야 한다는 자각을 안고 병원침상에서 뛰쳐나왔다는것을.
자기의 손에서 작업공구들을 빼앗는 중대원들을 믿음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박영복동무는 열렬히 호소했다.
《목표를 더 높이 정하고 올해 생산계획을 태양절전으로 무조건 끝냅시다.그래서 력사적인 당대회를 떳떳이 맞이합시다.》
주먹들을 내흔들며 자신있다고 호응하는 광부들의 가슴속에는 이런 지휘관과 함께라면 무엇인들 못해내겠는가 하는 배심이 더욱 깊이 자리잡았다.
충성의 70일전투의 하루하루를 알찬 실적으로 아로새기기 위해 박영복동무는 침식마저 잊고 뛰고 또 뛰였다.불편한 다리때문에 일에 지장을 받을가봐 그는 사무실로 잠자리를 옮기였고 온밤 신음소리를 내며 열에 떠있다가도 아침이면 또다시 광부들과 함께 막장으로 향하였다.입술이 부르트고 눈이 충혈된 그를 보다 못해 광부들이 앞을 막아나선적은 그 얼마였던가.
그러면 박영복동무는 결연히 말하군 하였다.
《당앞에 결의다진 목표를 수행하기 전에는 나에게 주저앉을 권리가 없소.내가 쓰러지지 않게 동무들이 좀 부축해주오.》
조국의 고지는 나의 고지라고 웨치며 결사전에 나서던 용사들, 팔다리가 부서지면 입에 수류탄을 물고, 턱으로 중기압철을 누르며 원쑤들을 족치던 불사조들이 어찌 전화의 나날에만 있었다고 하랴.
박영복동무와 같이 심장의 박동이 다할 때까지 당의 위업에 끝까지 충실하려는 조선로동당의 불사조들은 오늘도 끝없이 태여나고있다.
그렇게 온몸을 부시며 광부들을 혁신의 길로 이끌어가는 박영복동무의 노력으로 하여 중대는 70일전투목표를 빛나게 완수하였고 태양절전으로 년간계획을 완수하는 자랑찬 성과를 이룩하였다.
당 제8차대회를 보위하기 위한 80일전투때에도 박영복동무는 실천적모범으로 중대를 이끌어 당앞에 결의한 생산목표를 빛나게 수행하고 광산이 생산계획을 앞당겨 완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박영복동무에게 있어서 겨울은 제일 힘든 계절이다.불편한 다리로 얼음진 미끄러운 경사길을 오르내리기가 몇곱이나 힘에 부쳤기때문이였다.
어느날 박영복동무가 난데없이 벼짚을 한아름 안고 집으로 들어섰다.어디에 쓰려는것인가고 묻는 안해 탁영화녀성에게 그는 좀 쓸데가 있어 그런다고 얼버무리였다.
다음날 탁영화녀성은 남편이 신발에 벼짚을 꼼꼼히 동여매고 출근길에 오르려는것을 보게 되였다.겨울철에 미끄러운 길을 걷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다 했으랴.남편의 신발에 감겨있는 벼짚을 쓸어보며 탁영화녀성은 오열을 터치였다.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터놓았다.당신의 몸상태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꼭 이렇게까지 일해야 하는가고.
그러는 안해를 말없이 바라보던 박영복동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라고 왜 힘들지 않겠소.하지만 순간이라도 나약해지고 한걸음이라도 드티면 나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품을 배신하는것으로 되겠기에 입술을 사려물고 달음질치군 하오.나는 동발나무처럼 꿋꿋이 광산을 떠받들고싶소.》
이렇듯 당과 조국을 위해 필요한 삶을 이어가겠다는 자각이 굳센 사람만이 남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지하막장에서도 값높은 생의 자욱을 새겨갈수 있는것이다.그 나날 그는 공훈광부의 값높은 영예를 지니게 되였다.
공훈광부, 그것은 어떤 시련과 난관이 앞을 막아도 당의 믿음에 결사의 실천으로 보답하려는 신념의 한길만을 억세게 걸어온 지하막장의 불사조 박영복동무에 대한 당과 조국의 뜨거운 사랑이였고 값높은 표창이였다.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13년을 그렇듯 불같이 살아올수 있었는가고 묻는 사람들에게 박영복동무는 이렇게 말하군 한다.애국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으로 하는것이라고, 자기의 생을 당과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놓고 모든것을 바치겠다는 결심만 굳건하면 육체는 비록 말을 잘 듣지 않아도 당과 조국에 이바지되는 많은 일을 할수 있다고.
우리 갱, 우리 광부들
자력갱의 광부들과 가족들이 박영복동무를 진심으로 따르며 존경하는것은 그가 대중의 심장에 기적창조의 불을 지피는 훌륭한 지휘관이여서만이 아니다.그의 모습이 자신보다 당과 조국, 사회와 집단을 먼저 생각하는 참된 인생의 모범으로 되기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광부들과 종업원들의 후방사업을 개선하겠는가를 진지하게 모색하던 박영복동무가 강기슭의 자갈밭을 개간하자는 안을 내놓았을 때였다.
일부 광부들속에서 의견이 분분했다.광물생산계획을 수행하자고 해도 바쁜데 어느 여가에 부업지를 개간하며 광산에서 생활에 리용할 물자들을 공급해주고있는 조건에서 자체로 농사까지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것이였다.그들에게 박영복동무는 말했다.우리가 부업도 하고 축산도 하면 그만큼 국가의 부담을 덜게 되고 생활도 윤택해지지 않겠는가고.
허나 새땅을 얻어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아무리 돌을 춰내도 밭갈이를 하고나면 또다시 자갈투성이로 변했고 지력을 개선하기 위해 수십리밖에서 진거름을 실어들이느라 밤을 꼬박 지새우는 때도 있었다.(전문 보기)
박영복동무(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