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10月 26th, 2018
혁명전통교양의 대전당 조선혁명박물관을 찾아서(40) :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봉화가 온 나라에 타번지게 하시여
사회주의강국건설전환시기관에 대한 참관은 선군시대 경제건설로선을 제시하시고 그 관철에로 온 나라를 불러일으키시여 부강조국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불멸의 업적을 보여주는 호실에서 계속되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한생을 애국의 한마음으로 불태우시며 험난한 길을 헤쳐오신 애국헌신의 장정은 우리 조국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부강조국건설의 만년초석을 마련하였습니다.》
강사의 안내를 받으며 3호실에 들어서니 《선군시대 경제건설로선》이라는 글발이 안겨들었다.
그 글발이 부각된 벽면의 중심에는 주체90(2001)년 8월 19일 라남탄광기계련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영상사진문헌이 정중히 모셔져있었다.
여기에서 참관자들은 당의 현명한 령도밑에 새 세기에 들어와 온 나라에 혁명적진군의 봉화, 라남의 봉화가 타오른데 대한 해설을 들었다.
당시 라남의 로동계급은 채취설비생산에서 전례없는 기적을 창조하였다.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웠지만 결사의 각오를 안고 세계에서 몇개 나라만이 독점하고있던 기계설비를 자체의 힘과 기술로 만들어냈던것이다.
력사적인 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로 라남탄광기계련합기업소를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 설비를 더욱 완성시킬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후 또다시 라남탄광기계련합기업소를 찾아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기업소에서 만든 설비를 보아주시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라남의 로동계급이 발휘한 당에 대한 높은 충정심과 결사관철의 정신, 투쟁기풍과 혁명적일본새를 새 세기 우리 인민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전체 인민이 라남의 봉화따라 창조와 변혁의 진군을 더욱 힘차게 다그칠데 대한 력사적인 발기를 하시였다.
강사는 새 세기 첫해에 라남의 봉화가 타오른것은 선군시대 혁명적대고조의 새로운 발단을 열어놓고 온 나라에 혁명의 북소리가 더 높이 울리게 하는 전환적계기로 되였다고 하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선군시대 경제건설로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라남의 봉화를 높이 들고 새 세기의 진군을 다그쳐나가는 우리 인민의 앞길에는 의연히 어렵고 복잡한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있었다.우리 인민의 견인불발의 투쟁으로 경제건설에서 많은 성과가 이룩되였지만 아직은 전반적인 공장, 기업소들의 생산이 높은 수준에서 정상화되지 못하고있었으며 제기되는 경제적애로가 적지 않았다.
당시의 실태는 나라의 경제건설방향을 옳바로 규정할것을 절실히 요구하고있었다.
이로부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새로운 경제건설로선을 제시하시였다.(전문 보기)
대서양련어바다양어의 개척지에 새겨진 불멸의 자욱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양어는 인민생활향상을 위하여 절대로 소홀히 할수 없으며 중도반단하여도 안됩니다.》
돌로 지은 막들이 많아 석막이요, 사람 못살 막바지골안이라고 하여 석막이라 불리운 이곳, 10년전까지만 하여도 모래와 먼지만이 흩날리던 곳이 오늘은 대규모련어종어기지, 굴지의 양어기지로 전변되였다.
이곳에는 가슴벅차오르게 하는 부름도 많다.
대서양련어바다양어의 개척지, 양어연구와 생산이 결합된 종합적인 양어기지, 우리 나라 양어부문의 본보기단위, 《물고기산원》…
평양의 대동강반에 멋쟁이로 일떠선 평양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 우리 인민들의 식탁에 오르는 련어와 더불어 가슴뜨겁고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수많이 안고있는 석막땅이다.
지난 7월 14일 석막대서양련어종어장을 찾으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시종 기쁨에 넘쳐계시였다.
자신께서 기억하고계시는 종어장의 본래모습과 대비해보시며 3년전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한폭의 그림같다고 매우 만족해하신 그이께서는 깊은 감회속에 혁명사적교양실을 돌아보신데 이어 팔각못에 이르시였다.
양어못이 넘쳐나게 욱실거리는 련어들, 양어못이 모자라 퇴수로에까지 꽉 차있는 물고기를 기쁨속에 보고보시며 련어를 많이 길러 평양대동강수산물식당에 보내주어 우리 인민들이 그 맛을 보게 하라고 당부하신 우리의 원수님, 그이의 심중에 과연 무엇이 가득차있었던가.
우리 원수님께서 늘 가슴속에 안고계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모습이 있다.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 사랑하는 인민을 위해 초인간적인 의지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 동해에서 대서양련어양어가 성공했다는 보고와 함께 바다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자래운 10kg이 넘는 조선의 첫 련어를 보게 되시였다.
현지지도의 길에서도, 줴기밥을 드시면서도 언제면 우리 인민들에게 련어를 맛보게 할수 있겠는가고 그리도 많이 물으시면서 온갖 대책을 다 세워주신 어버이장군님이시였다. 련어를 쓸어보시고 꼬리도 만져보시며 우리 인민들이 먹게 될 련어의 무게를 가늠하시려는듯 손에 들어보시려고 무진 애를 쓰시였다.
자신께서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이 련어를 번쩍 들어올리고 우리 인민들이 이제는 련어를 먹게 되였다고 세계에 대고 소리높이 웨치고싶다고 하실 때 일군들의 두볼로는 소리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날의 어버이장군님의 영상을 심장에 간직하고 이곳 일군들과 종업원들은 련어양어의 성공을 위해 온넋을 깡그리 다 바쳐왔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이 한적한 석막땅에서 련어양어라는 초행길을 내디딜 때 그들의 심장속에 고동친것은 무엇이였던가.
종어장 당책임일군의 이야기를 무심히 들을수 없다.
《처음 련어양어를 시작할 때 우리들중에는 련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 수령님들께서 념원하시고 우리 원수님께서 기다리시기때문에 무조건 해야 한다는것밖에 몰랐습니다.》(전문 보기)
모두다 사회주의애국공로자들처럼 살며 투쟁하자! : 불같은 충정과 헌신으로 당의 령도업적을 빛내여가는 참된 일군 -인민봉사총국 력포목장 제1분장 분장장 렴주복동무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진정으로 애국을 하려면 애국의 마음을 가지고 애국적인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애국은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이고 투신입니다.》
인민봉사총국 력포목장 제1분장 분장장 렴주복동무는 수도시민들의 식생활향상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숭고한 뜻을 높이 받들고 분장장으로 사업한 지난 16년간 해마다 고기생산을 정상화하여 수령님들의 유훈을 빛나게 관철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7차례, 위대한 장군님께서 3차례나 다녀가신 영광의 일터를 분장자체의 힘으로 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게 훌륭히 변모시켜 위대한 수령님들의 령도업적을 더욱 빛내이도록 하였다.
오늘 우리 당은 령도업적단위 일군들이 수령의 유훈관철전, 당정책옹위전에서 선봉적역할을 할것을 요구하고있다.
당에서 바라는 일은 죽으나사나 최상의 수준에서 무조건 해내고야마는 완강한 실천가, 실력가형의 일군, 애국자로 불리우는 렴주복동무의 삶은 절세위인들의 령도자욱이 깃들어있는 단위의 일군이라면 어떻게 살며 일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있다.
간절한 소원안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그러하듯이 렴주복동무의 하루하루도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속에 흘러가고있다. 분장에 모신 절세위인들의 령도업적을 전하는 혁명사적표식비와 사적건물들앞에서 그는 매일매일 인민을 위해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천만로고를 가슴뜨겁게 돌이켜보며 수령님들의 유훈을 다시금 심장속에 깊이 새기고있다.
우리가 분장을 찾은 이튿날 새벽에도 그는 로동자시절부터 수십년을 이어온 그 일과를 드티지 않았다.
《지금도 위대한 수령님들의 현지지도로정을 따라 걸을 때면 마치도 우리 수령님께서와 장군님께서 분장에 오신것만 같아 가슴이 울렁입니다.》
언제나 위대한 수령님들을 분장에 모시였던 영광의 그날에 사는 일군,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위대한 장군님께서 분장에 주신 현지교시를 자기에게 직접 주신 가르치심으로 생각하는 일군이 바로 렴주복동무이다.
우리가 분장을 찾았을 때 그가 처음으로 한 말도 《우리 분장의 창립일은 1954년 4월 15일입니다.》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후에 맞으신 첫 생신날, 얼마나 인민생활향상을 위해 마음쓰시였으면 그날에조차 평범한 돼지목장을 찾으시여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시였겠는가고 외우는 그의 목소리는 저으기 떨리였다. 가슴속에 이렇듯 불같은 충정을 안고사는 렴주복동무이기에 분장장사업도 분장의 사적건물들을 더 밝고 정중히 꾸리는것으로부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때 일을 돌이켜보며 부문당위원장 박순익동무는 신임분장장의 첫 사업은 종업원들의 가슴마다에 수령의 전사, 제자로서의 본분을 다시금 깊이 심어주어 그들이 단위의 면모를 령도업적단위답게 일신하기 위한 전투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게 하였다고 추억하였다. 그때부터 분장에서는 사적건물들에 대한 보수와 관리사업이 제일 중요한 사업으로 정상적으로 진행되고있다. 분장의 모든 일군들과 종업원들이 매일, 매 시각 자기들의 일터는 절세의 위인들을 모셨던 영광의 일터라는것을 자각하고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단위에 주신 유훈을 손금보듯 환히 꿰들 때 혁명과업수행에서는 반드시 기적이 일어난다는것이 렴주복동무의 지론이다.
그 나날에 있었던 일들가운데서 박순익동무는 한가지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전문 보기)
[정세론해설] : 력사발전의 흐름은 되돌려세울수 없다
오늘 제국주의자들은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가로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고있다.제국주의자들과 국제반동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복잡한 사태들이 련이어 일어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자주성을 요구하며 자주의 길로 나아가는 력사발전의 흐름은 그 무엇으로써도 가로막을수 없습니다.》
인류사회의 발전력사는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의 력사이다.
지난날 억압받고 착취받던 수억만 인민들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온갖 지배와 예속을 반대하고 자주성을 요구하고있다.인류력사의 전과정은 반동들이 력사발전의 흐름을 되돌려세우려고 발악적으로 책동하였지만 력사는 부단히 전진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진보가 이룩되여왔다는것을 보여준다.
현시대는 자주성의 시대이다.인간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지배와 예속은 낡은 시대의 유물로서 어디서나 배격당하기마련이다.침략과 전쟁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려는것은 자주적인간의 사회적본성에 기초한 인류의 리상이며 이러한 새 세계를 지향해나가는것은 력사발전의 기본방향이다.인간의 사회적본성이 변할수 없는것처럼 인류의 리상은 변할수 없으며 력사발전의 방향도 결코 달라질수 없다.
력사의 전진운동과정에 우여곡절이 있을수 있다.하지만 력사발전법칙은 결코 달라지지는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제국주의자들은 자주를 지향하는 인민대중의 투쟁을 가로막고 식민지체제를 유지해보려고 발악하였다.그러나 세계적범위에서 식민지민족해방투쟁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났으며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통치기반은 무너지고 자주성을 위한 인민들의 해방투쟁이 승리하는 력사적전환이 일어났다.
민족적독립과 자주권을 빼앗기고 력사밖에 있던 인민대중은 세계의 주인으로 당당히 등장하였다.국제문제해결에서 발전도상나라들의 발언권이 높아졌다.
발전도상나라들은 인류력사를 전진시키는 커다란 추동력으로, 제국주의자들과 맞서싸우는 위력한 력량으로 장성강화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신음하던 발전도상나라들이 력사무대에 당당히 진출하고 국제력량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지난 세기 90년대에 제국주의자들은 일부 나라들에서의 사회주의의 좌절을 놓고 마치도 력사발전흐름의 방향이 달라진것처럼 떠들었다.하지만 그것은 자주적인 새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력사의 소용돌이에 불과하였다.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좌절을 놓고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떠들면서 환성을 올렸지만 그것은 오산이였다.(전문 보기)
세계상식 : 사라진 군사기구들
와르샤와조약기구
1955년 5월 14일 평화와 안전, 사회주의전취물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에 의하여 조직되였던 군사정치동맹이다.
나토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는 이전 쏘련, 뽈스까, 체스꼬슬로벤스꼬, 로므니아, 마쟈르, 벌가리아, 민주도이췰란드를 성원국으로 하였다.
기구의 기본사명은 제국주의자들의 침해로부터 성원국들의 안전을 공동으로 보위하는것이였다.그러나 쏘련이 붕괴되고 동유럽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련이어 좌절되자 더는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되였다.
1991년 3월 31일 와르샤와조약기구해체가 선포되고 7월 1일 쁘라하에서 와르샤와조약의 효력을 중지할데 대한 의정서가 조인되였다.그리하여 나토를 견제하고 사회주의나라들의 공동방위를 위해 36년간 활동한 기구는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세아토)
동남아시아지역에 조직되여있던 군사동맹이다.
나토, 쎈토와 함께 미국의 전략실현의 한 도구로서 1954년 9월 8일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체결된 《동남아시아집단방위조약》에 따라 조직되였다.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랄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파키스탄을 성원국으로 하였었다.
기구내에서 점차 미국의 명령지휘체계가 통하지 않고 행동의 통일성도 보장되지 않았으며 여러 나라들이 기구에서 탈퇴함으로써 자기 사명을 다할수 없었다.1977년 5월 30일에 종말을 고하고말았다.(전문 보기)
력사의 갈피에서 : 진짜 특급전범자(2)
일제패망후에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도죠를 비롯한 전범자들은 사형에 이르기까지의 각이한 형벌을 언도받았다.하지만 첫번째로 꼽아야 할 특급전범자인 일본왕 히로히또는 법정에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전범자로 기소된 이전 시종장관 기도 고이찌가 재판정에서 히로히또가 군부에서 올라온 작전계획에 매일과 같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리유는 간단하다.미국이 일본을 재무장시켜 아시아지배전략실현의 돌격대로 써먹는데서 《국민통합의 상징》인 일본왕을 그대로 살려두는것이 유리하다고 타산했기때문이다.패망직후의 일본정치계도 맥아더를 대상으로 암암리에 막후공작을 벌렸다.맥아더사령부는 최종적으로 일본왕을 살려두는것이 《20개 사단의 화력에 맞먹는》 가치를 가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히로히또를 전범자명단에서 빼버렸다.
이렇게 놓고볼 때 도죠는 히로히또를 대신한 제물이나 같았다.력사기록에 의하면 일제가 패망한 후 히로히또는 도죠를 만나 자기를 위해 마지막까지 《충성》다할것을 요구하였다고 한다.즉 그가 전쟁의 모든 책임을 걸머지라는것이였다.
특급전범자로 락인되여 교수형을 언도받은 도죠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은것으로 하여 만사람의 지탄을 받았다.오직 히로히또만이 도죠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일제패망후 히로히또는 특급전범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감추어보려고 국민들과 세계를 얼려넘기는데 몰두하였다.
《인간선언》이라는것을 발표하여 일본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국가를 통치할수 있게 한 근본바탕인 자기의 《신》적인 존재를 《부정》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놀음을 벌렸다.이것은 전범국의 최고통치자로서의 죄과를 감소시키기 위한 술책의 하나였다.
히로히또는 자기에게는 군국주의군벌들의 꾀임에 넘어가고 핍박에 견디여내지 못한 죄밖에 없다고 하면서 《피해자》로 둔갑해나섰다.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수감자에 불과하였다.나에게는 아무러한 권력도 없었다.》고 횡설수설하였다.히로히또가 자기 실록에서 《만일 전쟁을 주장하는 내각의 결정을 반대한다면 일본은 반드시 혼란에 빠지게 될것이였다.》고 주장한것은 자기의 죄를 어쩔수 없는 일로 여기게 하기 위한 간특한 말장난질에 불과한것이였다.일본의 보수적인 력사학자들은 히로히또를 아무런 실권도 없었던 《허수아비군주》로 묘사하면서 전쟁책임을 도죠내각에 전부 넘겨씌웠다.
히로히또가 야스구니진쟈에 도죠를 비롯한 특급전범자들의 위패가 옮겨진 사실이 폭로되자 그에 대한 참배를 중지한것도 자기의 행적이 특급전범자들과 련루되는것을 두려워한 의식적인 회피였다.
하지만 력사적진실은 히로히또야말로 전쟁을 반대한 군주가 아니라 반대로 피비린내나는 침략전쟁을 명령하고 그 과정을 총괄한 제일가는 특급전범자였다는것을 실증해주고있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