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론해설] : 그날의 령혼들은 피의 복수를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73년전인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일본 교또부 마이즈루항입구 해안선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수역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련속적으로 울리면서 4 000t급의 배 한척이 두동강났다.검푸른 바다에는 삽시에 수난자들의 비명소리가 차고넘쳤다.배의 침몰로 수천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오늘까지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는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이다.
해방의 기쁨과 나서자란 고향땅에서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소중한 꿈을 안고 귀향길에 올랐던 수천명 조선사람들을 날바다에 수장해버린 일제의 대중적학살만행,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조선사람치고 과연 그 누가 잊을수 있겠는가.
세월이 흐르면 지나간 일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법이다.그러나 과거 일제가 저지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의 진상은 세월과 더불어 더욱 선명하게 밝혀지고있다.
력사는 단순히 시간의 루적이 아니라 모든 사실자료들의 체현자이며 진실의 거울, 정의의 심판자이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일제에 의한 조선인집단학살만행으로 력사에 기록되였다.
일본방위성 전쟁사자료실에서는 1945년 8월 19일 해군성 운수본부가 오미나또해군경비부 참모장앞으로 보낸 전보가 발견되였다.《우끼시마마루》의 운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전보는 오미나또해군경비부가 보낸 제181439호 전보에 대한 답전이였다.
당시 련합군의 명령으로 일본령해에서 100t급이상 되는 선박들의 항행은 금지되여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끼시마마루》의 운항이 허가되였다는것은 그자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라는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정부의 허가와 지시밑에 오미나또해군경비부는 《우끼시마마루》가 부산으로 가게 된다, 조선으로 가는 배편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회유와 기만으로 조선사람들을 배에 태웠다.결과 《우끼시마마루》는 정원을 훨씬 초과한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오미나또항을 떠나게 되였다.
《우끼시마마루》의 항로문제도 까밝혀볼 필요가 있다.
《우끼시마마루》는 처음부터 부산이 아니라 폭침장소인 마이즈루항 앞바다로 항로를 정하고 떠났다.이것은 애당초 배가 부산항까지 갈 계획이 아니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준다.폭발직전에 배에 탔던 일본인들이 부랴부랴 뽀트를 타고 달아난 사실도 폭침이 이미 계획되여있었다는것을 증명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사고발생당시 일본은 《우끼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해》 폭침되였다고 주장하였다.황당무계한 궤변이다.마이즈루항주변의 항로는 이미 기뢰해제가 끝나 안전하였다.이날 많은 배들이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갔지만 모두 무사하였다.
《우끼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해 폭침되였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목격자들은 만약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면 폭발시 물기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더우기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는데 배에서는 련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