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품이 온 민족의 진정한 고향이고 조국이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긴 의용군출신 로병들의 인생을 더듬어-

주체112(2023)년 4월 20일 로동신문

 

올해는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75돐,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민족의 운명에 가장 중대한 극적전환을 안아온 두 력사적사변의 의의에 대하여, 그것이 민족의 매 성원들 나아가서 민족의 력사에 미친 거대한 영향에 대하여 누구보다 정확히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긴 의용군출신 로병들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조국은 단순히 태를 묻고 나서자란 고향산천이 아니라 인민들의 참된 삶이 있고 후손만대의 행복이 영원히 담보되는 곳이며 그것은 수령에 의하여 마련됩니다.》

지구상에 나라도 많지만 조선민족처럼 그렇듯 온갖 수난과 곡절을 겪은 민족은 찾아볼수 없다.

반세기 가까운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흩어져가야 했고 그렇게도 갈망하던 해방은 맞았지만 외세에 의하여 강토와 민족이 북과 남으로 두동강 나고 가렬처절한 전쟁의 참화로 우리 민족은 쓰라린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되였다.이 민족비극의 와류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에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였다.

과연 우리 조선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기고 살 진정한 요람, 참다운 삶의 조국은 어디인가.

그 대답을 우리는 력사가 알고 민족이 아는 오영재, 김성진, 김영황동지들과 같이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으로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의용군출신 로병들의 운명에서 찾으려고 한다.

 

가자,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미제국주의와 리승만괴뢰도당이 도발한 전쟁은 8.15해방후 5년동안 북과 남으로 갈라져 살던 우리 겨레의 운명에 실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며 노도와 같이 진격하는 조선인민군의 진군과 더불어 해방된 남녘땅에서는 공화국의 인민적시책들이 련속 실시되였다.인민공화국, 인민군대라는 그 이름그대로 인민을 위한 정책만 실시하고 인민의 리익을 지켜 싸우는 그런 나라와 군대를 창건하시고 령도하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정치에 남녘인민들은 매혹되였다.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와 함께 해방된 남녘의 청년들은 미제침략자들을 조국강토에서 완전히 내몰기 위한 성전에 떨쳐나섰다.정의감으로 불타는 열혈청춘들의 심장에 와닿은 두 제도, 두 군대의 극적인 차이는 그들로 하여금 주저없이 인민의 세상, 인민의 군대를 선택하게 하였다.인민군대에 합세하기 위한 청년들의 의용군탄원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수십만에 달하는 이 의용군대오속에는 후날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고도 살아나 세계전쟁사의 유일무이한 기적의 주인공으로 이름떨친 김성진동지도 있었다.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에는 그가 의용군에 입대하기 전의 생활에 대하여 남긴 이런 글이 보존되여있다.

《나는 9살 나던 해에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나 강원도 녕월탄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지금도 배고파 우는 젖먹이동생을 업고 탄광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가 십장놈에게 들키여 죽도록 매를 맞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하루는 우리 부락에 살던 한 일본놈아이가 떡을 먹으면서 자랑하기에 떡이란것을 딱 한쪼각만 먹어보자고 졸랐더니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산에 가서 소나무껍질을 벗기기 시작하였다.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긴칼을 찬 일본놈이 어머니를 마구 장작패듯 했다.그때부터 어머니는 자리에 앓아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희망에 넘쳐 우리가 살던 고향으로 가자고 하면서 먼길을 떠났다.나도 이제는 학교에도 가고 우리도 마음껏 농사지을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 먼길이 힘들지 않았다.하지만 정작 고향에 와보니 일본놈들대신 기여든 미제의 악행으로 살길은 더 암담해졌다. 아버지는 또다시 고용살이를 하게 되였고 나도 아이보개노릇을 하였다.

18살의 청년이였던 나는 고향을 해방시켜준 인민군대덕에 진짜기쁨을 맛보았다.우리 가정은 꿈같이 땅을 분여받았다.그 땅을 다시는 잃지 않으려고 나는 의용군입대를 탄원하였다.》

김성진동지가 인민군대가 해방한 고향땅에서 사람답게 살아본 날은 불과 한주일도 되지 않는다.그 한주일의 체험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과 조국을 결정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땅, 난생처음 차례진 소중한 땅을 지키기 위해 순박한 농촌청년은 주저없이 조선인민군 병사가 되였다.

주체과학교육의 최고전당 김일성종합대학의 인민과학자이며 원사, 교수, 박사로 명망높은 김영황동지는 어떻게 되여 의용군에 입대하였는가라는 물음에 이런 추억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민군대에 의한 서울해방은 당시 대학생이였던 젊은 김영황동지에게 그처럼 갈망하던 참다운 애국에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개선연설을 지지하여 남녘청년학생들의 웅변모임무대에서 만장을 격동시켰던 그는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다를바 없는 미군정의 야만적인 학정을 반대하는 투쟁에서도 선봉에서 용감히 싸웠다.청년지식인의 눈으로 본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정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의이고 진리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야말로 전체 조선민족이 대대손손 안겨살아야 할 진정한 인민의 리상사회, 인민의 국가였다.

대학생 김영황은 서슴없이 교복을 벗고 인민군대의 군복을 입었다.공화국을 따르고 지키는 길이 참다운 애국의 길이며 향학의 포부를 실현할수 있는 길임을 그는 자신의 정의감으로 명백히 판단하였던것이다.

주체문학발전에 빛나는 공헌을 한 영웅시인인 오영재동지가 1950년 7월 의용군에 입대할 때의 나이는 15살이였다.그는 나이를 세살이나 불구며 떼를 써서 기어이 총을 잡았다.

어릴 때 물속에도 진창에도 덤벙덤벙 뛰여들군 하는 그의 별명은 《덥석》이였다고 한다.그러나 의용군입대를 탄원한 그 의기는 결코 10대의 소년들이 흔히 덥석 빠지군 하는 감상적인 용감성이 아니였다.

그가 사는 전라남도의 궁벽한 마을에도 인민군대가 공화국기를 날리며 들어섰다.질풍같이 달려오던 자동차들이 갑자기 멈춰섰다.한 인민군군관이 달려왔다.오영재의 집앞에 펴놓은 벼단들을 잠시 바라본 군관은 자동차대렬에 손짓하였다.그러자 주런이 늘어섰던 차들이 후진하더니 대렬은 마을뒤로 난 소로길로 접어들었다.황급히 벼단을 거두던 그의 어머니는 너무 감심하여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인민군댄 영 다른 군대로구나.》

한해전 이맘때 이길로 괴뢰군의 자동차들이 미친듯이 달려왔다.그것들은 오영재의 집만이 아닌 이웃집들에서 펴놓은 벼단들도 사정없이 깔아뭉갰다.마을어른들의 하소를 조롱하며 휘파람을 불어대면서 달아난 강도무리들을 어머니는 욕질했다.

《저것들한테는 집도 부모도 없는가!》

두 군대의 대조적인 모습은 숫눈처럼 깨끗한 소년의 가슴속에 사진처럼 새겨졌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백성들을 위하고 지키는 인민군대가 되자.)

의용군병사들의 선택의 동기와 충동은 이렇듯 각이했다.출신과 처지, 환경과 나이도 달랐다.로동자, 농민출신도 있었고 지식인출신도 있었다.머슴군총각도 부엌데기처녀도 있었고 부유한 집의 자식도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만은 꼭같았다.그것은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도, 미제의 발굽밑에서도 살아본 피눈물나는 생활의 체험이 내린 용단이였으며 비록 단 하루의 새 생활이였다 해도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정치가 옳고 공화국제도가 진정한 인민의 세상임을 절감한 열렬한 정의감이 떠밀어준 선택이였다.

그러나 운명적인 선택이 불변의 신념으로 되자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속에서 자신을 이겨내는 의지의 체험을 겪어야 한다.

1950년 가을의 준엄한 시련은 민족의 모든 성원들에게 다 그러하였지만 특히 남쪽에 고향을 둔 의용군출신 병사들에게는 선택한 운명의 길을 끝까지 가는가 마는가를 판가름하는 엄혹한 시험장으로 되였다.그들은 북행길이냐 고향길이냐 하는 두갈래 갈림길에 서게 되였다.

당시 20살의 김영황동지에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정말 저를 두고 떠나겠어요? 꼭 의용군병사가 되여야 한다는 의무는 없지 않나요.》

《의용군이 되는것은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우리 청년들스스로의 선택이요.그 대오에 서지 못한다면 난 후세앞에 영영 머리를 들수 없을거요.》

사랑하는 처녀와 나눈 마지막대화를 되새겨보는 그의 귀전에 불현듯 어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왔다고 한다.아들을 의용군대오에 떠밀어주며 어머니는 하고싶은 말을 짧은 한마디에 담았다.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너에게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니.믿음이 있는 사람은 죽는 법이 없다.》

김영황동지는 최고사령부를 찾아가는 인민군대오의 신념의 보무에 자기의 발걸음을 맞추었다.

그 시각 설악산릉선을 타고 북쪽으로 힘겨운 행군을 이어가던 오영재동지는 함께 입대한 고향청년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였다.

《북에 가면 누가 있어? 고향에 돌아가자.난 영어도 알아.아무렴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온 우릴 죽이기야 하겠어?》

불과 두달전까지만 해도 애숭이였던 오영재동지의 생각은 착잡하였다.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갈팡질팡 방황하던 그들은 북행길에 오른 한 인민군군관과 만나게 되였다.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난 군관은 말했다.

《우리는 지금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를 찾아가고있소. 장군님께서 계시는한 우리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이기오.동무들도 장군님의 전사들이 아닌가.》

역경속에서도 신념이 투철한 인민군군관의 확신에 찬 말은 나약해졌던 오영재동지를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었다.

(나는 인민군전사다.가자,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먼 후날 오영재동지가 알아본데 의하면 그때 설악산에서 끝내 돌아선 고향친구는 오래전에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북행길을 되돌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미국놈들에게 무참히 맞아죽었다는것이였다.설악산에서의 운명적인 선택을 결코 잊을수 없었던 그는 첫아들의 이름을 오설악이라고 지었다.

그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활에서 가장 소중한것을 뒤에 두고 이렇게 북행길을 선택하였다.공화국이 끝장났다는 악선전도, 의용군출신 병사들에 대한 적들의 집요한 유혹과 위협도 완강히 물리치고 북행길을 걸었다.

신념이란 무엇인가.자기가 일단 옳다고 선택한 길은 끝까지, 견결히 걸어가는 그 의지가 바로 신념이다.

《가자,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내린 의용군출신 병사들의 선택, 그것은 인생의 가장 귀중하고 정확한 선택이였다.그 선택으로 그들은 남녘의 고향에 두고온것에 비할수 없는 인생의 영광도 성공도 행복도 얻었고 무궁한 미래도 얻었다.

 

우리의 고향은 평양이다

 

공화국의 품에 안길 때 그들은 다같은 평범한 병사들이였다.재산이란 군용배낭 하나뿐, 말그대로 혈혈단신 두주먹뿐이였다.그러나 그들이 받아안은 인생의 재부는 얼마나 크고 올라선 인생의 높이는 얼마나 아득한것인가.

언제인가 공화국문단의 명성높은 시인인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오영재선생은 이런 물음앞에 선적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겠는가고, 철없을 때 떠나간것이 이제 와서 후회되지 않는가고.

오영재선생은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혈육들이 한지붕아래서 한생을 살아가는것을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녘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면 자그마한 인생의 울타리밖을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을것이고 태양이 찬란한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영영 모르고 한생을 마쳤을것이라고.

본인도 모르고있던 문학적재능의 싹을 찾아준것은 어머니당이였다.따사로운 그 은정속에 작가학원에 입학한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교복을 입고 무의무탁자로서 다른 학생들의 두배나 되는 장학금까지 받으며 공부를 하였다.

첫 자식이 태여나던 날에도, 자기가 지은 첫시가 발표될 때에도, 당의 사랑속에 외국에 가족휴양을 떠나고 위대한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받을 때에도 그는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잠 못들군 하였다.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따뜻하고 극진한 사랑으로 키워주고 내세워준 당의 은정이 너무 고맙고 그 위대한 사랑과 인정의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하는 괴로움이 너무 커서 그는 더 울군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오영재동지에게 당에 충직한 시인이라는 공화국작가의 가장 큰 영예를 안겨주시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들과 헤여져 수령님의 품을 찾아왔으며 지금까지 근 30년간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랐다고, 영광스러운 혁명대오에 서서 어려운 후퇴의 길도 걸었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후복구건설도 하였으며 창작적열정으로 심장을 불태우며 작품도 썼다고 하시면서 그는 우리와 함께 혁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며 우리가 공을 들여 키운 작가라고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어버이장군님의 그 믿음을 목숨이 다한들 잊을수 있으랴.

오영재선생은 자기가 보내드린 옷감으로 조선치마저고리를 정히 해입고 80번째 생일을 맞은 어머니가 써보냈던 회답편지의 구절을 자주 외워보군 하였다.

《…사람이 자식을 낳은것으로 부모가 아니지.그애 장래와 전도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지는것이 부모인데… 나는 너무도 부끄럽고 진토만도 못한 존재라 너에게는 더 말할것도 없구나.너의 소식을 들으니 한이 풀리는구나.내 이제 죽는다 해도 한이 없을것같다.…》

정녕 고향이란 어떤 곳인가.

민족을 향해, 세상을 향해 의용군출신의 시인 오영재선생은 목청껏 웨치고싶었다.진정한 내 인생의 고향은 위대한 어머니 조선로동당의 품이라고!

인생길은 홀로는 가지 못한다.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의지하기도 하고 그 어떤 성인의 학설이나 자기가 신봉하는 주의주장을 마음의 기둥으로 세워보기도 하며 함께 갈 벗을 구하기도 한다.그러나 그 어떤 생활의 교사나 귀인이 있다고 한들 수령의 위대한 사랑의 품속에 자기의 모든것, 자식들의 미래까지 전적으로 의탁하고 사는 사람만큼 그렇듯 확신성있게, 두렴없이 인생길을 걸을수 있는 복받은 인간들이 이 세상 또 어디 있겠는가.

세해전 8월 김영황동지는 만사람의 축복속에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생일상을 받아안았다.

영광의 기념사진들과 명예칭호증서들이 벽을 꽉 채운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에서 위대한 어버이의 사랑속에 90번째 생일을 뜻깊게 쇠며 거의 한세기와도 맞먹는 인생을 돌이켜보는 그의 심정은 실로 감개무량하였다.그는 자손들에게 말했다.

《나는 정의와 진리를 찾아 공화국으로 왔다.외세에 짓눌려 넋을 잃은 남녘에서는 민족의 얼인 언어마저도 잡탕이 되였다.공화국과 로동당은 나에게 진리와 정의의 학원과 애국의 교단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소원대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한 그날부터 김영황동지의 한생은 조선어학에 대한 연구로 흘러왔다.민족의 태양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그는 자기의 전공을 선택했고 그 뜻을 꽃피우는 길에서 조선언어학계의 원로가 되였다.

비록 청춘시절에 애인과 리별했지만 그는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서 한생을 바쳐 사랑할수 있는 가장 귀중한것을 찾았다.그것은 민족의 언어 평양문화어였다.주체과학교육의 최고전당에서, 세계각국의 대학교단에서 그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평양문화어의 력사적뿌리와 우수성에 대하여 가르쳤다.민족의 고향인 평양을 알고 민족의 조국인 주체조선을 알게 했다.

학자, 교육자, 인간으로서 성공한 인생을 산 보기 드문 행운아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긍지에 넘쳐 말하군 했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에 나와 자식들의 운명을 통채로 맡겼기에 나에겐 불안도 고민도 걱정도 아픔도 없다.해놓은 일보다 더 높이 평가해주고 넘어질세라 부축해주는 당이 언제나 곁에 있기에 내 마음은 언제나 즐겁고 든든하다.억만금으로도 살수 없는 복락을 주는 위대한 당이 바로 나를 장수하게 해주었다.…

하기에 의용군출신 학자는 인생 90년을 총화하는 자리에서 절절히 토로했다.

《평양은 내 인생의 성공의 고향, 영광의 고향, 행복의 고향입니다!》

정이 있으면 타향도 고향처럼 여겨지지만 정이 없으면 고향도 타향처럼 느껴지는것은 생활의 법칙이다.남쪽에 고향을 두고도 기어이 공화국의 품으로 돌아온 의용군출신 비전향장기수 김선명동지는 한생토록 지켜온 운명의 선택에 대한 신념을 이런 말로 설명했다.

《나는 인민군대생활 1년동안에 난생처음으로 김일성장군님의 품속에서 사람대접을 받았다.…이제 전향하면 50년은 더 살수 있겠지만 그 50년이 내가 사람대접을 받으면서 산 1년동안의 인민군대생활에 비하면 너무도 헐값이여서 바꿀수 없었다.》

김성진동지가 몸으로 적의 화구를 막고 쓰러졌을 때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었다.그러나 공화국을 자기의 진정한 조국으로 선택하고 그 조국을 위해 둘도 없는 목숨도 서슴없이 내댄 충직하고 용감무쌍한 의용군출신 육탄용사가 꼭 살수 있다고 굳게 믿으시고 그의 실낱같은 마지막숨결에 기적의 생명수를 부어주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기적적으로 소생된 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1953년 6월 어느날 김성진동지는 뜻밖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전사가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그를 한품에 안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수 부상당했던 자리를 조심히 쓸어보시며 《상처자리에 손을 대면 아직두 아프지, 숨쉬기두 괴롭구.》라고 근심어린 어조로 따뜻이 물으시였다.김성진동지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들처럼 어버이수령님의 옷섶이 자기의 눈물로 얼룩지는것도 모르고 흐느껴울었다.

전선형편이 아무리 어렵고 긴장해도 사단사업을 인계하고 병원에 가서 의료일군들과 함께 치료대책을 세우고 수시로 최고사령부에 보고하라고 당부하시면서 평범한 전사의 침상을 항일투사사단장이 직접 지키도록 해주시고 귀한 보약까지 보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야말로 김성진동지를 두번다시 태여나게 한 새 삶의 고향이 아니던가.

어버이의 지극한 인정에 떠받들려 김성진동지는 21살에 끝마쳤을 생을 그 몇배로 빛나게 이어왔다.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믿음속에서 그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관장으로 로당익장하였다.오늘은 그의 딸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일군으로 일하며 만사람에게 영웅조선의 위대한 력사를 줄기차게 이어주는 어버이품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전하고있다.(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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