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6月 15th, 2007
사설 : 민족자주의 기치높이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자
(평양 6월 15일발 조선중앙통신)15일부 《로동신문》에 실린 사설 《민족자주의 기치높이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자》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시대는 우리 겨레가 6.15북남공동선언의 기치, 《우리 민족끼리》기치를 높이 들고 자주통일운동을 거족적으로 벌려나가는 민족사의 새로운 시대이다.
력사의 시련과 도전을 과감히 뚫고 헤치며 자주통일위업이 힘차게 전진해나가고있는 시기에 우리 민족은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발표 7돐을 맞이하고있다.
온 겨레는 만난을 이겨내고 자주통일위업을 기어이 완성하고야말 비상한 각오와 의지를 더욱 굳게 새겨안고있다.
돌이켜보면 민족의 분렬사에 처음으로 평양상봉이 마련되고 온 민족의 자주통일의지가 반영된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이 채택된것은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였다. 평양상봉과 6.15북남공동선언의 채택은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전체 우리 민족의 가슴가슴을 크나큰 환희와 통일에 대한 희망으로 설레이게 하였다.
6.15북남공동선언이 채택된 때로부터 지난 7년간은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의지와 지향이 내외에 힘있게 과시된 격동적인 나날이였다.
온 겨레는 6.15북남공동선언의 정신에 맞게 외세의 간섭을 단호히 반대배격하고 민족주체적자각과 의지로 조국통일운동을 떠밀어왔다. 민족의 단합과 통일을 위한 투쟁에서 민족자주의 원칙, 《우리 민족끼리》의 리념을 철저히 구현하여온것은 6.15통일시대의 자랑찬 투쟁모습이였다.
6.15북남공동선언의 기본정신인 《우리 민족끼리》는 자주통일을 갈망하는 온 겨레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시대의 정신으로, 전민족적인 리념으로 되였다. 조국통일운동에서 민족자주의 대, 《우리 민족끼리》의 대가 확립되였다. 우리 민족의 내부문제에 개입하여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던 미국의 부당한 간섭행위는 통할수 없게 되였다.
조국통일의 주체적력량이 확대강화되고 조선반도의 대결구도에서 변화가 일어났다.남조선에서 민족자주의식과 화해, 단합기운이 급격히 높아졌으며 반외세자주화운동이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하였다. 민족적화해와 자주통일운동은 대세를 이루고 외세에 추종하여 대결과 반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은 민족의 버림과 규탄을 받아 시대의 기슭으로 밀려났다.
6.15북남공동선언을 철저히 고수리행하여 자주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려오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 겨레는 민족끼리 손잡고 힘을 합쳐 투쟁하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민족단합의 진리를 깊이 간직하였다. 내외반동들이 6.15통일시대의 흐름을 되돌려세워보려고 갖은 발악적책동을 다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운동의 앞길을 결코 가로막을수 없었다.
민족자주의 기상이 나래친 6.15통일시대의 현실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자주통일사상과 의지가 안아온 빛나는 결실이다.
어버이수령님의 조국통일유훈을 하루빨리 실현하시려는 확고한 의지를 지니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마련하시고 6.15북남공동선언을 탄생시켜주심으로써 민족자주통일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애국애족의 헌신과 끝없는 로고에 의해 우리 민족의 통일운동은 민족자주의 궤도우에서 꿋꿋이 전진할수 있었으며 일찌기 있어본적 없는 새로운 장을 펼칠수 있었다.
외세의 침략전쟁책동으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운명, 자주통일위업을 굳건히 지켜주고 민족의 존엄과 위용을 만방에 떨쳐준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령도는 자주통일시대의 전진을 확고히 담보해주는 필승의 보검으로 되였다.
《우리 민족끼리》기치밑에 벌어진 지난 7년간의 자주통일투쟁은 6.15북남공동선언의 견인력과 생활력을 힘있게 시위하였다.
나라의 통일을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이룩해나갈데 대하여 천명한 북남공동선언은 온 겨레의 자주통일지향과 열의를 비상히 고조시키고 자주통일운동이 거족적으로 힘차게 벌어질수 있게 하였다. 우리 민족은 실지투쟁체험을 통하여 6.15북남공동선언이야말로 자주통일의 리정표로 된다는것을 절감하였다.
전체 조선민족은 앞으로도 어떤 시련과 난관이 가로막아도 력사적인 6.15북남공동선언을 변함없이 고수하고 철저히 리행해나감으로써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위업을 반드시 이룩해야 할것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우리는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 나라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룩해나가야 한다.》
민족자주의 기치를 변함없이 높이 들고 조국통일운동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가는것은 오늘 우리 겨레앞에 나선 중요한 시대적과제이다.
지금 내외반동들의 책동으로 조선반도의 정세는 의연히 긴장하며 자주통일의 앞길에는 시련과 난관이 적지 않게 가로놓여있다. 하지만 우리 겨레는 통일의 전도에 대하여 락관하고있다. 그 어떤 힘도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진군을 멈춰세울수 없다.
온 겨레는 비상한 각오와 의지를 안고 민족자주의 기치, 《우리 민족끼리》기치를 변함없이 높이 들고나가야 할것이다.(전문 보기)
東京朝鮮第2初級学校・枝川裁判、和解が成立!
◆和解が成立!(2007年3月8日第17回)
2007年3月8日(木)10:30より東京地裁615号法廷にて、第18回口頭弁論が開かれた。37名分の傍聴券を求めて130名を越える人が列をつくった。
今回の弁論では、原告(都と区)と被告(東京朝鮮学園)の間に和解が成立した。
まず最初に被告東京朝鮮学園代理人が第9準備書面を陳述し、戦前の強制的移住からはじまる歴史的経緯、本件土地が戦後直後から朝鮮人が心血を注いで作り維持してきた朝鮮学校の場であり、将来にわたっても朝鮮学校でありつづけることから、裁判所に英断を求めた。それを受け、裁判所は、前回の東京朝鮮学園理事長、宋校長および弁護団の意見陳述を踏まえ、また、当地が戦後直後からずっと朝鮮人子弟の教育の場、朝鮮学校であり、今後もそうであり続けることに鑑み、和解を勧告した。当事者双方は和解勧告を受け止めると述べ、裁判所は弁論手続きを終結し、続けて、部屋を移し、非公開の和解手続に移行し、そこで和解が成立した。
主な内容は朝鮮学校側が都・区から当該都有地・区道部について、市価の10%弱である1億7000万円の和解金を支払うことにより、所有権を取得するというもの。これで三年三ヶ月にわたる枝川裁判は終わりを迎える。
裁判終了直後に弁護士会館で記者会見が行われ、その後場所を移して支援者に対する報告集会が開かれた。
まず弁護士と学校関係者による発言があった。
「水面下での交渉になり、突然の発表となってしまった」と言う金舜植弁護士は、やや緊張した面持ちで弁護団談話を読み上げた。そして今回の和解について簡単に解説したのち、市価の10%弱という和解金に触れ「これは民族教育の権利を都側が認めざるを得なかったことを示した」と強調した。
金順彦同学園理事長は「色々と情勢が難しい中、本当に心配した。和解できたことが嬉しい」と喜びを表現し、理事長声明を読み上げた。
校舎取り壊しを危機を免れた東京朝鮮第二初級学校の宋賢進校長は、「裁判を支援してくれた弁護士、同胞、枝川支援連絡会、そして韓国からも、多くの方が支援してくださった。本当に感謝したい」と発言した。そして3年3ヶ月計18回に及んだ裁判を「学校の教員、保護者、生徒が本当に不安な日々を迎えていた」と同時に裁判を通じて支援の輪が広がったと振り返った。また和解が成立したことで「今後、民族教育がもっと発展される条件が整った」とし、「校舎建て替えなど大きな課題が本当に山積みだが、裁判に比べれば本当に夢のある悩みだ」と心情を吐露。最後に裁判を通じて「日本人とのよい関係ができた」として、「今後とも支えてくださった皆さんと共に、やっていきたい」と意欲を見せた。
次に行われた質疑応答では、1億7千万円という和解金の額が妥当かという質問が投げられた。金弁護士は「子供が安心して学べることを第一に優先した」としながら、「学校側に認められるだろう賃借権相当の部分を差し引いても市価の4割ほどになるだろう」とし「四割より安い10%弱であることからもこちらの勝利」と語った。
また師岡康子弁護士は。「判決で、日本ではじめての民族教育権確立を勝ち取りたいという気持ちもあったが、他方、本件裁判はこちらが起したものでなく、東京都から学校取り壊しという攻撃を仕掛けられたものであり、子どもたちが人質にとられており、また、訴訟提訴前にも東京都との間で格安値での買取交渉をしてきた経緯もあり、子どもたちの教育の場確保を最優先にして、早期解決のために和解を選択した」とコメントした。
張学錬弁護士も「この裁判は形式的には民事裁判だが、内容的には学校つぶしという恐ろしい裁判だった」と言い、和解金の安さに「書かれてはいないが、都が民族教育権を認めざるをえなかったのとかわらない」と語った。
その後、裁判支援者の発言が続いた。
枝川支援連絡会の佐藤信行氏は、裁判の間2年弱で、枝川都民基金に591万円の寄付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た。
枝川都民基金の共同代表である大津健一氏は「会合のたび弁護団から「必ず勝つ」と聞かされていたのでとても勇気付けられていた。都民基金は今後もやっていく」とコメントした。
証言記録が裁判を助けた『東京のコリアンタウン』を出版した樹花舎代表の花村健一氏は「江東区の朝鮮人の聞き取りを単行本としてまとめたときから関わっていた。日本人として、朝鮮人と思いを共にしてきた。今後も日本の誤った流れに抗していきたい」と語った。
ミレ(未来)・枝川朝鮮語講座を主催する福島有伸氏も「本当に嬉しい。第二(朝鮮学校)を日本人との新たな関係をつくるところにしたい」と発言した。江東区の在日朝鮮人一世の聞き取りを行った支援連絡会の村田文雄氏は「(当時)本は売れなかったが裁判に役立ってよかった」とコメントした。
裁判前から枝川住宅管理委員会の委員長を務めてきた金成泰氏は「本当に嬉しい」としながら、「在日朝鮮人一世の証言記録が残っている地域が少ない。記録してくれた日本人に感謝したい」と挨拶した。そして「実は12年だ。都との交渉は阪神大震災の95年から始まっている。当時払い下げの直前までいったのに、政治状況がかわり都の態度が急変した」と振り返った。最後に「校長も言ったとおり、日本人とよい関係をつくりだすために、今後もがんばっていきたい」と挨拶した。
集会の最後に、支援連絡会の佐藤氏が同会の声明を読み上げた。それは次のように結ばれている。
「私たちにとって枝川裁判の何よりも大きな収穫とは、枝川朝鮮学校に学ぶ子どもたちに出会い、また枝川朝鮮学校の教員をはじめ、保護者、卒業生、学校を支える枝川の町の人びとと出会い、議論をし、共に裁判闘争を担ったことである。そして全国各地、韓国の仲間たちと、「枝川」を通して知り合えたことである。これ以上の「成果」があるだろうか。私たちは、「裁判闘争」に勝利したのである」-枝川裁判支援連絡会のページ裁判報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