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조일관계/朝日関係’ Category
죄악에 찬 과거는 절대로 가리울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1월 8일발 조선중앙통신)
일본의 과거 성노예범죄를 고발하는 증거자료들이 계속 드러나고있다.
지난해말 일본 도꾜도 신쥬꾸구에 있는 《녀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은 구일본군이 성노예녀성들을 가두어두었던 장소들을 표시한 지도를 10년만에 개정하여 웨브싸이트를 통해 공개하였다. 각국에서 발견된 공문서자료 등에 기초하여 작성된 지도에는 23개 나라 및 지역에 관한 수천개의 자료가 반영되여있다.
일본의 한 대학교수는 《지금까지 특정한 나라 및 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자료는 있었지만 이번에 작성한 지도는 구일본군이 점령한 아시아태평양지역전체의 <위안소>자료들을 수집정리한 대단한것》이라고 하면서 실태를 해명하는데서 기초로 될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성노예범죄는 절대로 감출수 없는 엄연한 력사적사실이며 세월이 흐를수록 범죄의 진면모가 더욱 낱낱이,명백히 밝혀지고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알려진바와 같이 일제가 아시아의 《맹주》가 되여보려는 야망밑에 지난 세기 침략전쟁을 벌리면서 저지른 성노예범죄는 정부와 군부에 의해 국가조직적으로,체계적으로 감행된 동서고금에 있어본적이 없는 특대형반인륜범죄였다.
일제는 극도로 부패타락한 《황군》의 동물적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과 중국,필리핀,타이,윁남,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많은 아시아나라 녀성들과 유럽녀성들까지 침략전쟁터들에 끌고다니면서 인간으로서,녀성으로서의 그들의 존엄과 권리를 무참히 유린하였다.
특히 성노예주요보급지,원천지로 조선을 정한 일본은 처녀들은 물론 남편과 자식이 있는 녀인들 지어 11살의 미성년소녀들까지 도합 20만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랍치,유괴하여 갖은 치욕을 다 안기였으며 증거인멸을 위해 집단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범죄에 가담하였던자들의 실토,끊임없이 발견되고있는 관련문서 등으로 론박할 여지조차 없는 범죄의 력사를 뻔뻔스럽게 강부인하고있다.
지어 성노예피해자들을 《매춘부》,《돈을 바라고 한 자발적행동》 등으로 모독하다 못해 《일본군성노예》라는 표현조차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외교청서》에 박아넣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본이 과거의 침략범죄를 한사코 부정하고 정당화하는 정치적사기행위에 집요하게 매달리는것은 과거청산의 법적,도덕적의무를 벗어던지고 력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실현하기 위한 군국주의정신적기초를 다지자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
일본반동들의 과거범죄부정책동은 전범국 일본에 대한 세계의 경계와 증오의 눈초리만 더욱 날카로와지게 할것이다.
일본당국은 파렴치한 책동에 계속 매달리는 한 언제 가도 세인의 신의를 얻지 못하게 될뿐더러 전체 렬도를 처참한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게 된다는것을 깨닫고 이제라도 바른 길을 택하여야 한다.
그 선택의 첫 순서는 과거청산이다.(전문 보기)
극악무도한 도자기략탈만행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10)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문화재들가운데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것의 하나가 바로 여러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도자기이다.
일제는 도자기략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가운데서 가장 악랄하고 날강도적인것은 우리 선조들이 제일 공경해온 조상의 무덤을 백주에 도굴하여 부장품으로 묻힌 도자기들을 략탈한것이다.
광란적으로 감행된 일제의 도굴략탈만행으로 고려시기의 옛무덤들은 완전히 파헤쳐져 페허로 변하였다.이 과정에 략탈당한 고려자기들은 수십, 수백만점을 헤아렸다.
한 일본인은 《고려도자의 연구》에서 《고려자기, 이것들은 어느것이나 도굴에 의하여 고려시대의 옛무덤에서 드러난것이다.때로는 가마터의 출토품도 있으나 전세품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다.》라고 폭로하였다.
일제시기 고려자기에 대하여 언급한 도서들은 어느것이나 할것없이 고려자기들이 모두 도굴품이라는것을 실토하였다.
고려자기의 최대략탈자는 조선통감이나 조선총독을 비롯한 우두머리들이였다.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의 도자기를 대대적으로 긁어모아 일본으로 빼돌린 략탈자, 도적무리의 괴수였다.
이에 대하여 《도자여적》의 필자는 《…최초의 골동품수집열은 이또 히로부미가 이것저것 막 긁어가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되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함으로써 이또 히로부미가 다름아닌 고려자기의 최대략탈자라는것을 폭로하였다.
이또는 숱한 고려자기들을 일본으로 반출하였는데 그중 103점의 우수한 명품을 왜왕에게 바쳤다.또한 고려자기들을 《선물》로 대관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그 광경에 대하여 《도자여적》에는 《한번은 이또가 전례대로 고려청자를 한짐 싣고 도꾜역에 도착했다고 한다.역홈에 마중나온 사람들에게 이또가 내려오면서 〈자네들에게 주려고 고려청자를 선물로 가져왔으니 기차에 올라가 꺼내가지라.〉고 했다 한다.그러자 모두들 앞을 다투어 기차에 뛰여올라 깨진 청자병이며 사발 등을 서로 먼저 가지려고 법석을 떨었다고 했다.》고 씌여져있다.
이또가 고려자기략탈에 피눈이 되여 날뛴것은 그가 동방예술의 최고를 이루는 고려자기의 예술적가치나 고고학적가치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조선의 우수한 민족문화를 파괴략탈하여 조선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말살하려는 체질적인 강도적본성과 식민지의 최고권력자, 조선침략의 원흉으로서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비렬한 목적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초대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도 이또에게 짝지지 않게 고려자기략탈에 열을 올리였다.
이자는 고향에 《조선관》을 설립하고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수천점에 달하는 문화재를 소장하였는데 그중에는 고려시기 무덤들에서 도굴한 고려자기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여있었다.
꼭뒤에 부은 물이 발뒤꿈치로 흐른다고 침략과 략탈의 원흉들의 본을 따서 형형색색의 인간쓰레기들이 우리 나라에 기여들어와 앞을 다투어 도자기략탈에 광분하였다.(전문 보기)
무엇을 노린 《오보》소동인가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1월 6일발 조선중앙통신)
야망달성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일본의 실체가 또다시 드러났다.
새해를 앞두고 일본의 NHK방송은 《북조선미싸일이 혹가이도동쪽 2 000㎞ 해역에 락하》하였다고 보도하였다가 20여분이 지나 《실수》니,《오보》니 하며 세상을 소란케하였다.
소위 고도기술을 자랑하는 일본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이러한 《오보》소동을 단순히 실수나 착각으로 보기에는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흉심이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명백히 자국내에 우리에 대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를 기화로 재침을 위한 무력현대화를 다그치려는 속심의 뚜렷한 발로이다.
《오보》소동과 때를 같이 하여 일본언론이 2020년부터 일본방위성이 중거리대공미싸일이 장착된 현존 미싸일방위종합체를 현대화할 계획이며 앞으로 수년안에 완성하려 한다고 공개한 사실이 이를 실증해주고있다.
지금까지 일본은 그 누구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구실밑에 재침을 위한 군사대국화의 발판을 《착실히》 닦아왔으며 그 준비를 완성하는데 더욱 본격적으로 달라붙고있다.
또다시 섬나라를 전쟁국가로 만들려고 날뛰는 일본반동들의 위험한 기도는 민심의 배격을 받고있다.
지난해 11월 일본에서 평화헌법공포일을 맞으며 전국적인 개헌반대시위가 열리고 《전쟁과 무력보유를 금지한 평화헌법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터져나온것이 그 대표적실례이다.
기어이 옛 식민지종주국의 지위를 다시 획득하려는 군국주의야망에 환장한 일본반동들과 더우기 개헌을 일생일대의 정치목표로 내세운 수상 아베에게 있어서 헌법개정에 대한 사회적지지를 받는것은 최대급선무로 나서고있다.
일본반동들이 민심을 역전시켜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려고 고안해낸것이 바로 미싸일《오보》소동이다.
외신들은 NHK가 지난 2018년 1월에도 류사한 허위경보를 내보낸 전적이 있다고 하면서 《이 모든것이 조선에 대한 적대적립장을 유지하기 위해 아베정부가 고의적으로 조작해냈다는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고 한결같이 평하고있다.
그러면서 《일본국영보도매체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들〉을 저지른다는것이 리해되지 않는다.》,《이러한 허위경보가 무장분쟁으로 번질수 있는 지금처럼 예민한 시점에서 〈무책임적인 실수〉가 경시되여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질타해나서고있다.
국민들속에 우리에 대한 공포증과 반발심을 야기시키고 국제사회의 시선을 흐려놓으려는 일본반동들의 교활한 술수는 절대로 통할수 없다.
일본이 재침야망에 들떠 적반하장격으로 놀아대다가는 멸망의 시간표를 앞당기는 결과만을 가져오게 될것이다.(전문 보기)
천인공노할 왕릉도굴만행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9)
일제의 문화재파괴략탈에서 첫 대상으로 된것은 전국각지에 분포되여있던 각이한 시대의 옛 무덤들이였다.
선조들의 분묘를 알뜰히 보호관리하고 해마다 제사를 정성들여 지내는것은 조선민족의 오랜 풍습이였다.우리 민족은 특히 력대 왕조들의 시조릉에 대한 보호관리와 제사를 중시하였다.우리 인민이 그토록 신성시하고 대대로 보존관리하여오던 력대 왕조들의 릉묘는 일제침략자들의 야만적인 만행으로 무참히 파괴략탈당하였다.
일제침략군에 의한 도굴과 파괴략탈은 청일전쟁, 로일전쟁시기에 본격화되였다.
력사기록에는 《1894년-1895년 청일전쟁시기에 벌써 일본인문화재략탈집단이 대거 침입하였다.1904년-1905년 로일전쟁전후시기에 그들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나 강화도일대에서 고려고분을 철저히 도굴하였다.》고 씌여져있다.자료에 의하면 청일전쟁때 일제침략군은 릉묘의 형태를 갖춘것은 다 도굴하였다.지어 2차, 3차 들이닥쳐 도굴한 릉묘들도 적지 않았다.한 일본인은 《재일조선문화재와 일본인의 책무》에서 《1904년부터 2~3년동안이라고 하면 마침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터닦기가 진행되고있던 때인데 이 기간에 개성과 강화도, 해주 등에서 고려의 왕릉을 비롯한 약 2 000기의 분묘에 대한 대도굴이 행하여졌다.일본군대는 백주에 공공연히 폭약까지 써서 10만점이 넘는 청자와 그밖의 부장품들을 략탈하였다.》고 그 죄행을 폭로하였다.어느 한 왕릉을 도굴할 때 헌병, 경찰 등 수십명으로 무리를 이룬 침략군 대도굴단은 릉의 째임새에 무식하였으므로 나드는 곳을 찾지 못하여 무덤무지의 북쪽부분을 폭파하고 그안에 들어가 많은 량의 유물을 략탈해갔다.
우리 나라를 무력으로 강점한 후 일제는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을 공포한데 이어 5개년에 걸치는 《고적조사계획》을 발표하였다.이것은 더 많은 옛무덤을 도굴하여 유물들을 략탈하기 위해서였다.
《고적조사계획》이 완전한 략탈적성격을 띠였다는것은 이 계획수행을 위해 조직된 《조선고적조사위원회》의 구성과 행태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일제는 중추원안에 25명으로 구성된 《조선고적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기구의 절대다수는 총독부고관들이였고 전문고고학자는 한두명에 불과하였다.그들은 기구조직후 2~3개월동안에 고려시기의 무덤들을 포함한 수백기의 옛무덤을 파헤치고 수많은 유물을 략탈하면서 아무런 과학적발굴자료도 남기지 않았다.
일제의 악랄성은 조선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을 비롯한 력대 왕조들의 시조릉부터 파헤치고 파괴략탈한데서 뚜렷이 나타났다.그렇게 한 목적이 유적유물들을 략탈하여 저들의 부를 축적하자는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시조왕들에 대한 우리 인민의 숭배심을 억제하고 말살하자는데 있었다.
주목하게 되는것은 1909년 일제가 세끼노를 비롯한 어용학자들을 내세워 조선의 옛 건축물, 옛무덤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실시하던 첫 시기에 벌써 강동의 단군릉에 검은 촉수를 뻗치고있었다는 사실이다.(전문 보기)
강탈을 노린 전면적인 조사행위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7)
일제는 조선침략의 길에 나선 첫 시기 우리 나라의 문화재를 파괴략탈할 목적으로 조사놀음부터 벌려놓았다.
일제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직건달군들과 같은 인간쓰레기들을 우리 나라에 들여보내여 조선민족의 우수한 문화재들을 마구 강탈하도록 하는것과 동시에 어용학자들을 침략과 략탈의 척후병들로 파견하였다.《학자》의 탈을 쓰고 기여든 이자들은 우리 나라의 여러 지방을 돌아치면서 문화재들을 빠짐없이 장악하였으며 《조사》의 명목으로 고분들을 파헤치고 수많은 문화유물들을 략탈하였다.
이러한 조사는 청일전쟁, 로일전쟁과 같이 조선반도를 중심으로 중요한 사변들이 발생할 때마다 선행되군 하였다.
청일전쟁전야에 조선봉건정부의 움직임을 내탐하기 위해 수많은 밀정들이 우리 나라에 침입하였는데 그들중에는 《고고학자》로 가장한자들도 끼여있었다.도꾜제국대학에 적을 둔 야기는 그러한자들중의 하나였다.이자는 1893년에 삼국시기 옛무덤이나 고인돌을 《조사》한다는 미명하에 우리 나라에 기여들어와 여러 지역을 싸다니면서 수많은 문화유적들에 대한 자료를 걷어쥐였다.야기는 우리 나라에 기여든 일제침략군의 비호하에 뻐젓이 무덤을 도굴하고 유물들을 략탈해갔다.
20세기초에 들어서면서 우리 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 로일전쟁을 준비하는 속에서도 일제는 조선의 문화재들을 략탈하기 위해 사전작업으로 세끼노 다다시라는 어용학자를 들여보내여 중요한 문화재들을 모조리 조사장악하게 하였다.
1902년 당시 도꾜제국대학 교수였던 세끼노 다다시는 《학장의 복명》이라는 지령하에 6월부터 8월까지 부산, 경주, 대구 등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선의 유적과 옛 건축물들을 조사하고 그와 관련한 내용을 담은 《조선건축조사보고》를 정부에 제출하였다.이 조사는 조선의 문화재를 략탈하기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이였다고 할수 있다.
세끼노는 1909년에 다시 우리 나라에 기여들어와 문화유적들에 대한 보다 세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목적은 통감통치로 조선의 사법권을 강제로 틀어쥔 조건에서 건축물을 어떻게 다룰것인가 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것이였다.그를 위해 세끼노는 옛 건축물들에 대한 자료를 쥐는 한편 고분들도 적지 않게 파헤쳤으며 전국의 유적들을 샅샅이 조사하였다.조선의 유적유물을 종합적으로 조사한 세끼노는 《조선유적일람표》를 지방별로 작성하였으며 등록된 유적들에 《갑을병정》의 등급까지 달아놓았다.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대문화》라는 책에서 《조사》의 미명하에 감행된 유적유물략탈행위에 대해 이렇게 실토하였다.
《우리들의 학술조사는 고물수집가(일본인도굴군과 골동상)들에 의한 유적의 파괴를 조장시킨 좋지 못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수 없다.대체로 조선에서의 유적의 파괴 특히 고분도굴은 로일전쟁후 고려청자가 부장되였던 개성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여 경북 선산부근을 위주로 하는 락동강류역에 한하였고 1923~1924년에는 락랑고분군이 또한 대규모의 도굴을 당하게 되였다.》(전문 보기)
조선종에도 뻗친 강탈의 마수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6)
일찌기 우리 선조들은 금속주조기술을 부단히 발전시켜 우아하고 훌륭한 종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봉덕사종을 들수 있다.이 종은 전반적형태가 세련되고 표면에 새겨진 장식조각이 훌륭하여 예술적품위에서 그 어디에 비길데 없을뿐아니라 종소리 또한 아름다운것으로 하여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함축되여있다고 할수 있다.
봉덕사종과 같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취와 독특한 구조양식을 갖춘 종들이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걸려있었다.
문명수준이 매우 락후했던 일본으로서는 조선종과 같이 훌륭한 종을 자체로 만든다는것은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해외침략을 기본정책으로 내세우고있던 일본침략자들은 고려시기부터 우리 나라에 빈번히 기여들어와 많은 조선종을 도적질해갔다.
략탈해간 조선종들가운데서 《추명이 있는 종》(략탈해간 후 덧새긴 글이 있는 종)은 10여개에 달하며 절반이상의 새김년대가 1367년부터 1381년사이라고 한다.이것은 고려말기에 일본침략자들의 조선종략탈만행이 우심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본침략자들의 날강도적인 조선종략탈만행은 임진조국전쟁시기에 더욱 로골적으로 감행되였다.
대규모적인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침공한 일본침략자들은 발길이 닿는 곳마다에서 살인방화를 일삼는 한편 불교사원들을 돌아치면서 종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해갔다.침략자들은 우리 나라 불교사원들에 있던 상궁신사종, 대원사종을 비롯하여 략탈해간 종들을 일본의 여러 절간에 걸어놓았다.
결국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조선종은 얼마 남지 않게 되였다.
일본인들자체도 조선보다 오히려 일본에 조선종이 더 많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어용사가였던 세끼노 다다시는 신라의 범종이 조선에 몇개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고려시대의 범종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일본에 전해진것이 아주 많기때문에 당대(고려시대)의 동종양식을 충분히 연구할수 있다고 함으로써 일본이 여러 시대의 조선종을 수많이 략탈하였다는것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우리 나라 강점시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의 촉탁이였던 후지다 료사꾸도 《고려문화》라는 글에서 《조선종의 이름밑에 내지(일본)에 있어서 국보로 된것은 모두 고려시기의 범종으로서 조선안에 남아있는것은 적다.》고 함으로써 세끼노 다다시의 기록이 사실이라는것을 립증하였다.
일본통치배들은 적지 않은 조선종들을 일본의 《국보》로 지정해놓고 저들의것이라고 우겨대고있다.
사실들은 일본침략자들이 조선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거세말살하기 위해 얼마나 악랄하고 파렴치하게 날뛰였는가를 실증해주는 동시에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뿌리깊은 침략과 략탈의 력사를 만천하에 폭로하고있다.(전문 보기)
민족권리사수투쟁으로 끓어번지는 재일동포사회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 격렬하게 벌어졌던 4.24교육투쟁은 재일동포들이 갓 걸음마를 뗀 재일조선인운동을 요람기에 압살하고 자기들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으려는 일본반동들의 탄압책동에 맞서싸움으로써 이역땅에서 조선민족의 불굴의 기개를 힘있게 과시한 투쟁이였다.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 강의한 투쟁정신은 오늘도 동포들의 가슴마다에 력력히 살아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권리와 리익을 옹호보장하는것은 총련의 기본사명이며 임무입니다.》
폭로된바와 같이 일본반동들은 우리 공화국을 변함없이 따르며 민족성을 꿋꿋이 지켜가고있는 총련과 재일동포들을 적대시하면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에서 조선학교 유치반들을 배제하는 부당한 차별조치를 취하였다.총련의 민족교육을 기어이 파탄시키고 재일동포사회에서 민족성을 뿌리채 없애버리자는것이 그 주되는 목적이다.
재일동포사회에 분노의 회오리가 일어번졌다.
총련 《조선신보》에는 일본당국의 비렬한 민족말살책동을 짓부시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갈데 대한 글이 실리였다.글은 악의에 찬 민족말살책동에 광분하는 일본당국의 폭거를 짓부시기 위한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할 긴박한 요구가 나서고있다고 하면서 전체 총련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이 민족교육을 약화시키고 동포들을 조국과 총련조직에서 떼내려는 책동을 견결히 반대배격하는 전조직적인 투쟁을 벌려나감으로써 재일조선인운동의 생명선인 민족교육을 끝까지 고수할것을 호소하였다.
《일본당국의 전대미문의 민족교육말살책동을 준렬히 단죄규탄한다!》, 《재일조선인의 인권과 어린이들의 배울 권리를 굳건히 지켜내자!》, 《치솟는 분노를 안고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한 투쟁을 전동포적으로 힘있게 벌리자!》…
동포들이 웨치는 이런 투쟁구호가 온 일본땅에 울려퍼졌다.
각계층 재일동포들은 아이들의 순결한 마음에 못을 박고 칼질을 한 일본당국의 책동에 대해 치솟는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 이 야만적인 폭거를 짓부시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벌려나갈 의지를 표명하였다.
일본당국이 내외의 규탄여론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월 1일부터 실시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에서 조선학교의 유치반들을 끝끝내 배제하자 투쟁의 불길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총련의 교육일군들과 재일동포들은 10월 18일 일본 국회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부당한 민족차별정책을 즉시 철회할것을 일본당국에 강력히 요구하면서 11월 2일에 《조선유치원의 무상화를 요구하는 전국집회와 시위행진》을 조직전개할것이라는것을 예고하였다.같은 날 간또지방의 총련본부, 지부 및 중앙단체, 교육부문 일군들은 긴급모임을 가지고 어린이들에게까지 검은 마수를 뻗치는 일본당국의 비인도적인 책동을 절대로 용납 못할 민족말살책동, 전대미문의 파쑈적만행으로 규탄하면서 이를 분쇄하기 위한 제2의 4.24교육투쟁에 총궐기할 의지를 가다듬었다.조청원들을 비롯한 동포청년들은 사태의 본질을 까밝히는 거리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일본당국의 부당한 민족교육탄압책동을 준렬히 단죄하였다.(전문 보기)
과거청산은 국제사회와 인류의 요구이다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12월 14일발 조선중앙통신)
최근 일본에서 일본군성노예범죄에 군부와 외무성이 관여하였다는 자료들이 또다시 발견되였다.
일본내각관방이 새로 수집한 23건의 공식문서들중 중국주재 일본령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륙군측은 병사 70명당 1명정도의 접대부를 요구할 의향》,《군용차에 편승하여 남하한 특수부녀》라는 기록이 있고 여기서 《접대부 및 특수부녀》라는 표현에 대해 다른 보고서에서는 《기생과 같다.》,《추잡한 일을 강요당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군부와 외무성이 국가적견지에서 위안부들을 보내주고있었다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다.》고 하면서 1993년의 고노담화가 인정한 《군부의 관여》를 확증해준다고 주장해나섰다.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밑에 감행된 일제의 천인공노할 반인륜범죄행위는 결코 지워버릴수도 묻어버릴수도 없는 력사의 진실이다.
지금 국제적으로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화해와 협력의 새시대를 열어나가기 위한 움직임이 강화되고있다.
얼마전 도이췰란드수상은 뽈스까에 있는 아우슈위츠-비르켄나우 도이췰란드나치스집단학살수용소를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나치스도이췰란드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하였다.
그는 야만적인 범죄앞에서 마음속깊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서 과거를 잊으면 또다시 유태인대학살과 같은 만행이 감행될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그러면서 만행감행자들에 대하여 기억하는것은 도이췰란드인들의 영원한 책임으로서 도이췰란드국가와 분리할수 없으며 사죄와 보상을 위한 성실한 노력이 계속 될것이라는것을 확언하였다.
반면에 일본은 20만명에 달하는 조선녀성들을 비롯한 수많은 녀성들을 국가권력을 발동하여 조직적으로 강간,륜간한 다음 대량학살한 반인륜적인 특대형죄악을 력사의 흑막속에 묻어버리려고 발광하고있다.
아베일당은 《일본군의 위안부강제련행을 증명하는 자료가 없다.》,《돈벌이를 위한 자원봉사였다.》라는 망발까지 늘어놓으며 력사교과서들에서 성노예범죄관련사실을 서술하지 못하도록 하고있다.
녀성들을 침략군의 성노리개로 삼은 야수들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본군성노예상이 세계도처에 세워지는것을 막아보려고 날뛰는 한편 2019년 《외교청서》에 《일본군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문구까지 박아넣었다.
판이한 두 현실은 잘못된 과거와 깨끗이 결별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떳떳이 살아가려는 옳바른 립장을 외면하고 죄악에 찬 과거를 답습하려는 야만국가의 정체성,섬나라족속들의 도덕적저렬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이고있다.
과거죄악사는 부정한다고 하여 달라지지 않으며 분칠한다고 하여 정당화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새로운 《레이와》시대니,《적극적평화주의》니 하며 요설을 늘어놓아도 일본에 차례진것은 과거사를 반성하는데서 불성실하다는 국제적비난과 랭대,전범국이라는 오명뿐이다.
과거청산은 일본의 회피할수 없는 법적,도덕적의무이며 국제사회와 인류의 엄정한 요구이다.
범죄국가의 수의를 벗지 못하고 피고석에 있는 이상 일본의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것이다.(전문 보기)
전동포적으로 《100만명서명운동》을 – 일본국회앞에서 유보무상화적용을 요구, 120여명이 분노의 함성-
남승우부의장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일본당국에 대한 분노의 함성을 올렸다.
일군들과 동포들, 일본인사들 약 5,500명의 참가밑에 진행된 《조선유치반에 대한 유보무상화배제를 반대하는 11.2집회와 시위행진》(11월 2일, 도꾜)을 계기로 일본당국의 민족교육말살책동을 짓부시기 위한 투쟁의 불길이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있는 가운데 조선유치원유보무상화중앙대책위원회는 민족교육권옹호투쟁을 새로운 단계의 요구에 맞게 더욱 고조시키기 위하여 12월 1일부터 전기관적이며 전동포적인 《100만명서명운동》을 벌리기로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조선유치원을 비롯한 각종학교인 외국인학교유치원들에 대한 유보무상화적용을 요구하여 12월 6일 일본국회앞에서 시위와 서명활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총련중앙 남승우부의장, 송근학교육국장, 서충언국제통일국장, 총련중앙과 상공회, 조청, 녀성동맹, 청상회, 류학동, 인권협회를 비롯한 각 단체 일군들, 간또 5현의 교육일군들과 학부모들, 국회의원들, 일본단체대표들 120여명이 참가하였다.
《일본정부는 각종학교의 교육, 보육의 권리를 보장하라!》, 《일본정부는 조선유치반에 유보무상화를 당장 적용하라!》
참가자들은 서명운동의 취지서를 살포하였다.
총련중앙 남승우부의장을 비롯한 참가자들은 횡단막과 프랑카드를 들고 주먹을 추켜올리며 분노의 함성을 올렸다. 또한 길가는 사람들에게 서명운동의 취지서를 살포하고 많은 서명을 받아내였다.
시위에서는 서명활동의 발기인을 대표하여 《조선학원을 지원하는 전국네트워크》와 평화포럼의 후지모또 야스나리공동대표가 발언하였다.
그는 아베정권이 《다문화공생사회》,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를 표방하면서도 사회적소수파인 외국인의 민족교육권을 무시하고 일본헌법과 사회적리념에 배치되는 차별적정책을 감행하고있다고 강력히 비난하면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 아이들의 배움의 마당을 보장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적극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일본국회앞에서 서명을 받아내는 참가자들
립헌민주당 오쯔지 가나꼬중의원의원, 아베 도모꼬중의원의원, 하쯔시까 아끼히로중의원의원, 사회민주당 후꾸시마 미즈호참의원의원, 일본공산당 야마조에 다꾸참의원의원, 오끼나와사회대중당 다까라 데쯔미중의원의원, 《조선의 자주적평화통일지지일본위원회》미즈따니 겐지사무국장, 《고교무상화에서의 조선학교배제를 반대하는 련락회》 하세가와 가즈오공동대표, 모리모또 다까꼬공동대표, 고도모교육호센대학 사노 미찌오교수, I녀성회의 고우노스 미찌꼬중앙상임위원들도 뜨거운 련대인사를 보내였다.
이날 참가자들은 일본당국의 민족교육말살책동을 반대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유보무상화의 권리를 쟁취할 결심을 새로이 하고 광범한 동포들과 일본시민들을 서명운동에 힘차게 불러일으켜나갈것을 다짐하였다.
이날 일본의 언론각사와 텔레비방송국, 남조선의 련합뉴스가 취재하고 보도하였다.
서명운동은 당면하여 2020년 2월 29일까지의 3개월동안에 30만필의 서명을 받아내는것을 목표로 진행된다.(전문 보기)
력사, 문화의 공백기를 만들어낸 회화유산략탈행위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5)
일찍부터 문명수준이 높았던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나 자연경치, 사물의 모양 등을 아름다운 색채와 다양한 기법으로 정교하면서도 풍만하게 그려냈다.그러한 미술작품들은 지금도 세상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고있다.
고려시기만 보더라도 송나라의 이름있는 화가이며 평론가였던 곽야허는 도서 《도화견문지》에서 《회화의 정묘함은 고려의 고유한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고려화가들이 창조한 채색기법에 대해서는 《고려의 회화는 색이 독특하다.》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회화작품창작에서 발휘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그대로 계승되여 보다 세련되고 정묘한 회화작품들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을 일시적으로 강점하고 문화재들에 대한 파괴, 략탈에 환장이 되여 날뛴 일본날강도들에 의해 그처럼 귀중한 회화작품들이 수많이 략탈당하고 인멸되다싶이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몽유도원도》를 들수 있다.《몽유도원도》는 1447년에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이름난 화가 안견이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의 꿈이야기를 듣고 그린 두루마리 산수화이다.
《몽유도원도》는 15세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학자의 한사람이며 재능있는 패설작가였던 성현이 《신묘의 경지》에 달했다고 평가할 정도의 명품으로서 예술적가치에서뿐아니라 조선봉건왕조초기의 회화사연구에서도 중요한 사료로 되는것이다.
이 귀중한 회화유산은 일본침략군에게 략탈당하여 일본에서 오래동안 은닉되여오다가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한 일본인에 의해 공개되였다.
임진조국전쟁때 략탈된 서화들가운데는 고려시기와 조선봉건왕조초기의 불교미술작품들도 있다.일본침략군은 일시적강점지역들에 있던 불교사원들에 뛰여들어 구석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진귀한 불교회화작품을 수많이 략탈하여갔다.오늘도 일본의 여러 절간에는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그림들이 적지 않게 보관되여있다.
일본의 가가미진쟈에는 《양류관음상》이, 후꾸야마시 안국사에는 《보살삼존십왕도》가 있으며 나고야시의 흥정사에는 16세기 중엽에 그려진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최고불교미술작품인 《당회석가존》이 있다.
이 그림들은 일본침략자들에 의해 략탈당한 불교미술작품들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 일본인은 《당회석가존》을 포함한 조선봉건왕조시기의 회화작품들이 수많이 략탈되여 다른 나라에 류출되기도 하고 그 유래가 외곡되기도 했으며 지어는 다른 나라의 회화작품으로 오도되기까지 하였다는데 대해 지적하였다.그는 《일본국내에 소장되여있는 임진왜란이전의 조선불교미술작품의 대다수는 략탈품》이라고 하면서 조선봉건왕조불교미술작품으로서 기년명문이 판명된것은 세계적으로 수십점에 달하는데 그가운데서 대부분이 일본에 있고 그것들을 창조한 조선에는 몇점밖에 없다고 하였다.계속하여 침략에 의한 완전한 략탈은 면면히 계승되여온 조선의 력사, 문화의 공백기를 만들어냈다고 그 진상을 폭로하였다.(전문 보기)
■ 련재기사
-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1)
-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2)
-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3)
-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4)
-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5)
금속활자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해간 죄악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4)
일본이 과거에 일으킨 임진왜란을 일명 《활자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그것은 일본침략자들이 전쟁기간 인쇄업에서 개명을 할 정도로 우리 민족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금속활자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하여 리용하였기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류문화발전력사상 획기적사변의 하나로 되는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널리 사용함으로써 세계출판인쇄업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자기의 슬기와 재능을 세상에 과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는 이미 고려때에 발명되였다.
일찌기 문화발전에 힘을 넣어온 고려사람들은 서적에 대한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목활자인쇄기술을 발전시켜왔으며 그 경험을 토대로 하여 금속활자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출판인쇄업에 적극 활용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수십만개나 되는 금속활자를 주조하였다.이것으로 《조선봉건왕조실록》을 비롯한 수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금속활자들은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의 략탈의 대상이 되여 이 땅에서 거의다 사라지게 되였다.우리 나라의 문화발전은 커다란 지장을 받았다.
당시 침략군의 우두머리였던 우끼다 히데이에는 1592년 5월 한성(서울)점령과 동시에 남산기슭에 있던 교서관의 주자소에서 총 8만 9 814개의 동활자와 인쇄기계들을 략탈하여 도요도미 히데요시에게 바쳤다.
교서관은 조선봉건왕조시기 도서들을 출판인쇄하던 중앙기관이였다.
일본침략군이 전쟁기간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금속활자의 수는 20만개이상에 달하였다.그중 적지 않은 활자들이 지금도 일본의 인쇄회사들에 소장되여있다.
일본은 임진조국전쟁시기에 략탈해간 금속활자를 가지고 빈터나 다름없었던 인쇄업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할수가 없어 금속활자를 모방한 나무활자로 책들을 찍었다고 한다.그후 몇년이 지나서야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기 시작하였다.
에도막부를 세운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부하들이 조선에서 략탈해온 활자들을 몰수하여 많은 서적을 출판하였다.에도막부초기에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를 가지고 정치, 군사, 경제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을 찍었다.
대표적인 서적으로 우리 나라의 3대고려의학고전중의 하나인 《동의보감》을 들수 있다.
《동의보감》은 그 내용이 풍부한것으로 하여 일본에서 여러번 출판되였는데 처음에 출판한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금속활자들을 가지고 인쇄한것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불교사원과 민간에 널려있는 학자들에 의하여 조선금속활자를 리용한 책들이 많이 출판되였다.(전문 보기)
시대와 력사의 흐름에 대한 도전은 용납될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12월 4일발 조선중앙통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지난 시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사죄와 반성을 하고있다.
올해에 들어와 영국이 에티오피아에 문화유물을 돌려주고 도이췰란드가 이딸리아에서 감행한 나치스부대의 민간인학살만행에 대해 공식사죄하였으며 얼마전에는 프랑스가 19세기 세네갈에서 략탈하였던 문화유산을 반환하였다.
이것은 죄악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이 나라들의 의지의 발현인 동시에 과거문제해결로 나라들사이의 화해와 새로운 관계발전을 도모해나가는 현 국제적흐름을 반영한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그에 따라서기는커녕 정반대로 나가는 후안무치한 나라가 있다.
다름아닌 일본이다.
지금 일본은 조선인민과 아시아나라 인민들,인류앞에 저지른 엄청난 죄악에 대한 인정과 사죄,배상을 거부하고있다.
일본의 과거력사는 침략과 전쟁,략탈과 살륙으로 얼룩진 죄악의 력사이다.
특히 지난 세기초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막대한 자연부원과 귀중한 문화재보들을 략탈,파괴한 섬나라의 죄행은 동서고금에 류례를 찾아볼수 없다.
일본의 문화재략탈행위는 우리 나라를 강점하기 이전부터 감행되였으며 40여년간의 식민지파쑈통치기간 더욱 본격화되였다.
개성에 있는 경효왕릉(고려 31대왕의 왕릉)을 폭파하고 달구지 10여대분의 유물을 털어간것을 비롯하여 일제는 조선강점기간에 우리 민족이 수천년동안 창조하고 보존하여온 귀중한 유물들을 닥치는대로 일본으로 빼돌렸으며 가져갈수 없는것은 다 파괴해버렸다.
지금 도꾜 우에노박물관에는 《조선통감부》 첫 통감이였던 이또 히로부미가 략탈해간 조선문화재가 수백점이나 진렬되여있다.
도꾜국립박물관을 비롯한 크고작은 박물관들과 대학,절간들에 도자기,금속공예품,자개박이공예품,불상,그림,도서,활자 등 조선의 문화유물이 전시 또는 보관되여있다. 개인소유물로 된것까지 다 합치면 수십만점에 달한다고 한다.
일제의 조선문화재략탈행위는 단순히 개인에 의한 재산략탈이 아니라 관권과 군권의 총발동하에 조선민족을 완전말살하려는 목적밑에 감행된 특대형국가범죄행위이며 국제법에도 철저히 위반되는 용납 못할 국제범죄이다.
그러나 일본은 패망후 70여년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문화유물강탈을 비롯한 과거에 저지른 추악한 만행들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조차 없이 그를 전면부정,미화분식하고있다.
그것도 모자라 복수주의적재침야망으로 피를 끓이며 군국주의부활책동에 미쳐날뛰고있다.
일본이 어지러운 과거를 한사코 부여안고 책임을 회피할수록 뼈아픈 고통과 상처를 안고사는 우리 인민을 비롯한 인류의 대일적개심은 배가해지고있다.
일본은 시대와 력사의 흐름에 도전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걷어치우고 지체없이 과거청산에 나서야 한다.(전문 보기)
아베의 눈은 콩까풀을 씌웠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일본담당 부국장 담화–
바보는 약으로 고치지 못한다.
이는 이번에 우리가 진행한 초대형방사포 련발시험사격을 놓고 탄도미싸일발사라고 줴쳐대며 무지와 우매를 말짱히 드러낸 일본수상 아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베는 지난 11월초에 우리의 초대형방사포시험사격에 대해 아세안수뇌자회의마당에까지 나서서 탄도미싸일사격이라고 걸고들다가 방사포와 미싸일도 구분할줄 모르는 저능아,정말 보기 드문 기형아라는 개욕을 얻어먹고 처참하게 망신만 당하고도 여전히 콩과 팥도 분간 못하는 바보놀음을 계속하고있기때문이다.
11월 28일에도 아베는 우리의 초대형방사포의 련발시험사격이 대만족속에 성과적으로 진행되자 서둘러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소집하고 무작정 탄도미싸일발사라느니,국제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느니 하며 악청을 돋구어댔다.
큰 개가 짖으면 작은 개도 따라짖는다는 격으로 아베의 뒤를 이어 관방장관,방위상,외상을 비롯한 일본의 아래것들과 언론들도 《탄도미싸일발사》라며 덩달아 짖어대고있다.
우리가 이번 시험사격에 대해 보도하면서 발사장면사진들을 큼직하게 안받침하여 내보낸데는 아베와 같은 얼간이들이 다시는 착각하지 말고 무엇이 날아갔는가를 두눈으로 똑바로 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데 군복입은 사병들은 물론 《군》자도 모르는 민간인들마저 한눈에 알아볼 사진자료를 멀쩡히 보면서도 방사포와 미싸일을 구분 못하는 아베야말로 세계유일초유의 천치이며 최악의 못난이가 틀림없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온 세계가 우리의 이번 시험사격에 대해 방사포시험사격이라고 정평하고있지만 유독 아베만이 방사포를 미싸일이라고 우겨대면서 큰 변이 난듯이 새된 소리를 질러대며 별스럽게 놀아대여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고있다.
우리에게는 아베의 그 몰골이 겁에 질린 개라할지 아니면 미국이라는 주인앞에 잘 보이기 위해 재롱을 부리며 꼬리를 저어대는 강아지라 할지 어쨌든 개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조미협상이 교착상태에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그 무엇이든 《북위협》이라고 괴성을 지르면 미국이 좋아할것이라고 타산한것 같은데 역시 정치난쟁이의 머리는 참새골수준에서 벗어나기 힘든 모양이다.
눈에는 콩까풀을 씌우고 낯짝에는 철판을 씌운채 홀라닥거리는 아베이니 국제정치의 축에도 끼우지 못하고 주변에서 비실거리는 털빠진 강아지취급을 받으며 조롱받는것은 너무도 당연한것이다.
이렇듯 희귀한 천치,눈에도 차지 않는 난쟁이와 괜히 상종하다가는 망신살만 무지개살 뻗치듯 할것이므로 애당초 영원히 마주서지 않는것이 상책이라는것이 날로 굳어져가는 우리의 생각이다.
더우기 대양건너에서도 다 알아본 방사포를 조선동해를 사이에 두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으면서 탄도미싸일이라고 줴쳐대는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일본해역에 떨어지지도 않은 포탄을 놓고 《일본뿐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니,《북의 위협》이니,《항의》니 하고 행악질을 해대고있으니 더욱 꼴불견이다.
때린 사람도 없는데 얻어맞았다고 생떼를 쓰는 아베는 철부지바보가 분명하다.
조선속담에 곤장을 메고 다니며 매를 청하는 미물이 있다고 하였다.
아베는 진짜탄도미싸일이 무엇인가를 오래지 않아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보게 될수도 있을것이다.
그때 가서는 방사포탄과 탄도미싸일이 어떻게 다른것인지 잘 대비해보고 알아둘것을 권고한다.
아베는 정말로 구석구석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바보이고 둘도 없을 희대의 정치난쟁이이다.
평양은 아베라는 물건을 이렇게 품평한다.(전문 보기)
朝鮮外務省日本担当副局長が安倍は希代の政治小人と嘲笑
【平壌11月30日発朝鮮中央通信】朝鮮外務省の日本担当副局長は30日、「安倍の目は膜をかぶせたのか」と題する次のような談話を発表した。
馬鹿は薬で治せぬ。
これは、今回われわれが行った超大型ロケット砲連発試射を受けて弾道ミサイル発射と言って、無知と愚昧(ぐまい)を完全にさらけ出した日本首相の安倍にぴったり合う言葉だと言える。
それもそのはず、安倍は去る11月初めにわれわれの超大型ロケット砲試射についてASEAN(東南アジア諸国連合)サミットの場でも弾道ミサイル射撃と言い掛かりをつけてロケット砲とミサイルも見分けられない低能児、本当にまれな奇形児と侮辱され、凄惨に恥だけをかいてからも相変わらず大豆と小豆も見分けられない馬鹿のまねを続けているからである。
11月28日にも安倍は、われわれの超大型ロケット砲の連発試射が大満足に成功するや否や、急いで国家安全保障会議を緊急招集して無鉄砲に弾道ミサイル発射だの、国際社会に対する深刻な挑戦だのと青筋を立てた。
大きな犬が吠えれば小さい犬も一緒に吠えるというふうに、安倍についで官房長官、防衛相、外相など日本の下の者とメディアも「弾道ミサイル発射」と雷同して吠えている。
われわれが今回の試射について報道しながら、発射場面の写真を大きく添えて発信したのは、安倍のような間抜けどもがまた錯覚せず何が飛んだのかを両目ではっきり見ろという意味もあった。
ところが、軍服を着た兵士はもちろん、「軍」の字も知らない民間人も一目で見分けられる写真資料をはっきり目にしながらも、ロケット砲とミサイルを見分けられない安倍こそ世界で唯一無二の白痴であり、最悪の抜け作に違いないと言わざるを得ない。
世界がわれわれの今回の試射についてロケット砲試射と正しく評しているが、ただ一人安倍だけがロケット砲をミサイルと言い張って大きな事でも起こったかのように甲高い声を上げ、へんてこに振る舞って世人の嘲弄(ちょうろう)の種になっている。
われわれには、安倍のそのざまが怖じ気づいた犬と言うべきか、でなければ米国という主人に気に入られるためにじゃれて尻尾を振る子犬と言うべきか、とにかく犬以上には見えない。
朝米協商が膠着(こうちゃく)状態にある現時点で、それが何であれ「北による脅威」と奇声を発すれば米国が喜ぶと打算したようだが、やはり政治小人の頭はスズメの頭の水準から脱することが難しいようだ。
目には膜をかぶせ、面には鉄板を張り付けたままちょこまかする安倍だから、国際政治の仲間入りもできず、周りでよろよろする毛が抜けた子犬扱いされながら嘲弄されるのは、あまりにも当然なことである。
このように珍しい白痴、目にも止まらない小人を無駄に相手すれば恥をかくだけなので、最初から永遠に向き合わないのが上策ということが日ごとに固まっていくわれわれの考えである。
まして、大洋の向こうでも見分けたロケット砲を朝鮮東海を挟んでわれわれと一番近い位置にありながら弾道ミサイルと言い散らすのもあきれてものが言えないことだが、日本の海域に落ちてもいない砲弾について日本だけでなく国際社会に対する深刻な挑戦だの、「北による脅威」だの、「抗議」だのと横暴に振舞っているのだから、いっそう見苦しい。
叩いた人もいないのに叩かれたと強情を張る安倍は、がんぜない馬鹿に間違いない。
朝鮮のことわざに、持った棒で打たれる馬鹿がいると言われた。(記事全文)
서적략탈에 환장이 되여 날뛴 날강도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3)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마구 파괴하였을뿐아니라 수없이 략탈하였으며 그것을 저들의 국보로 만들어놓는 파렴치한짓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문화재략탈을 위해 전투병력과는 별도로 략탈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까지 조직하여 이르는 곳마다에서 각종 서적과 금속활자, 회화작품, 종을 비롯한 재부들과 심지어 민간인들의 생활용품까지 닥치는대로 강탈하여갔다.
일본침략자들이 제일 많이 략탈해간것은 우리 나라의 력사발전이 기록되여있는 각종 서적이다.
침략의 괴수였던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우리 나라의 문화재략탈을 위해 침략군우두머리들을 내몰았으며 일본특유의 아부아첨이 체질화된 하수인들은 상전에게 잘 보이려고 많은 서적을 략탈하여갔던것이다.
일본침략군두목 우끼다 히데이에는 출정직전에 히데요시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에서 올 때 그의 비서 겸 주치의사에게 무엇을 선물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었다.이때 히데요시는 그가 의술로 복무하니만큼 그에게 의학서적을 가져다주라고 하였다.하여 히데이에는 그후 조선에서 략탈한 많은 의학서적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여러 절간의 중들을 자기의 문서비서 겸 참모들로 등용하였는데 이들 역시 우리 나라에 기여들어 많은 활자와 서적들을 략탈하였다.
히데이에와 같은 일본침략군우두머리들은 중의 탈을 쓴 략탈자들의 추동하에 관청들과 량반들의 장서들을 샅샅이 뒤져 귀중한 책들을 털어갔다.
히데요시의 손발노릇을 하던자가 《고려대장경》을 략탈하여간것을 비롯하여 침략자들은 15세기에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양휘산법》, 《산학계몽》, 《상명상법》 등 수학과 관련한 책들도 략탈하여갔다.
그중에는 《산판》이라는 책도 있었다.이 책을 통하여 일본에서는 주산이 활발히 보급되고 주산과 관련한 도서가 편찬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략탈하여간 수학서적들을 번역하여 보급시킴으로써 수학을 알게 되였는데 이것은 일본수학발전의 기초로 되였다.
일본침략군은 또한 우리 나라의 3대고려의학고전중의 하나인 《의방류취》도 략탈하여갔다.
일본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조선본》책을 가지고있으면 큰 자랑거리가 되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략탈하여간 책들은 후날 주로 에도막부시기에 복사, 번역출판되여 널리 퍼졌다.그런 경우 《조선본》을 기본으로 하여 이를 복간하는것이 상례였다.이것은 당시 일본의 학문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한다.
전쟁이후 조선에서 구할수 없는 서적이 일본에서 때때로 발견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의 서적에 얼마나 눈독을 들이고 략탈해갔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일본의 한 학자는 《일본각지에 다이묘(봉건령주)들의 소장품이던 희귀한 조선책들이 대량적으로 실재해있는것의 의미를 우리는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였다.(전문 보기)
민족의 우수성말살을 노린 극악한 행위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2)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은 력대 왕조실록을 비롯한 귀중한 서적들과 각종 문화재들을 파괴소각하였다.
오랜 옛날부터 학문을 숭상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온 우리 선조들은 각 분야의 도서들을 많이 집필하여 출판하였다.
출판인쇄업이 독자적인 분야로 발전한 삼국시기 고구려에서는 책이 널리 보급되고 학문이 깊이있게 연구되였다.이에 대해 어느 한 나라의 력사책에는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여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까지도 각각 거리에 큰집을 짓고 경당이라 하여 자제들이 결혼전에 밤낮으로 여기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우리 나라의 출판인쇄업은 고려시기에 들어서면서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더욱 활기를 띠고 진행되였다.
글을 모르는것을 수치로 여긴 고려사람들의 숭문정신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였으며 결과 수많은 도서들이 출판되였다.하여 우리 나라는 책이 많은 나라라는 의미에서 《문헌지국》으로까지 불리웠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력사를 자랑하는 서적들은 외세의 침략으로 수많이 루실되게 되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의 서적파괴행위로 하여 홍문관과 춘추관 등에 보존되였던 수많은 서적들이 재더미로 되였다.이 책들은 14세기말이래 수도와 지방들에서 금속활자와 조판기술에 의하여 출판된것으로서 문화적가치가 매우 큰것들이였다.
침략의 괴수인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침략전쟁을 일으키자마자 자기가 특별히 신임하던 안고꾸지 에께이를 조선에 보내여 우리 나라 4대사고의 하나였던 성주사고의 책들을 몽땅 털어가려고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을 실현할수 없게 되자 에께이는 성주사고에 불을 질러 많은 책을 불태워버렸다.
성주사고가 불탈 때 그곳에 보관되여있던 국보적가치가 큰 《조선봉건왕조실록》이 불타 없어졌다.
《조선봉건왕조실록》은 조선봉건왕조가 세워진 때로부터 있은 력사적사실들을 기록한 책으로서 분량이 방대하고 서술체계가 독특하며 사료들이 가치있는것으로 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진 문화재이다.
실록은 임진조국전쟁이전에 4부를 인쇄하여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 전주사고에 각각 나누어 보관하였었다.
그러나 일본침략자들의 방화로 성주사고뿐아니라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보관되였던 《조선봉건왕조실록》이 모두 불타버렸다.
다행히 전주사고의것만은 애국적인민들에 의하여 전쟁의 재난으로부터 구원되여 남아있게 되였다.
애국적인민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여있던 《조선봉건왕조실록》과 《고려사》를 비롯한 가치있는 민족고전들을 내장산으로 가져갔다가 침략군이 전라도에 기여들 위험이 조성되자 다시 배길로 황해도 해주에 옮겨갔으며 그후 묘향산의 불영대에 날라다가 보관하였다.그리하여 《조선봉건왕조실록》과 《고려사》 등 민족고전들은 전쟁의 피해를 면할수 있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서적파괴책동으로 말미암아 관청이나 민간에서 기록한 수많은 문서들이 없어졌으며 력사를 맡은 관리들의 개인서류들도 거의다 불타거나 못쓰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만행으로 우리 민족의 재능과 우수성을 보여주는 각종 문화재들이 파괴소각되였다.
세계적으로 가장 정밀한 측우기와 수위척을 비롯한 관측기구들과 기계들이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전후 한동안 기상관측사업이 중단되게 되였다고 한다.
우리 인민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문화재들을 파괴한 일본침략자들의 야만적인 행위로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실물자료들과 력사문헌자료들이 수많이 없어지고말았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 감행된 일본의 조선문화재파괴책동은 조선민족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끊어버리고 우리의 민족문화 그자체를 말살하려는데 목적을 둔 반인륜적범죄행위이다.(전문 보기)
력사의 진실은 절대로 감출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사 론평–
(평양 11월 26일발 조선중앙통신)
일본이 2019년 《외교청서》에 《일본군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문구를 박아넣었다.
결국 《매춘부》,《돈을 바라고 한 자발적행동》 등으로 강변해온 저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것이다.
인륜도 수치도 모르는 일본의 날강도적궤변은 그야말로 흑백전도의 극치이며 성노예피해자들은 물론 지난 세기 일제의 침략으로 온갖 불행과 고통을 당한 전체 조선민족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범죄사실을 로골적으로 부정하는 망동은 침략력사를 외곡하고 과거청산을 회피하려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과거 일본이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포함한 각국의 녀성들을 침략군의 성노리개로 끌어가 청춘을 빼앗고 인권을 짓밟은것은 천추만대를 두고도 용서받지 못할 반인륜범죄이다.
인류력사에 수많은 전쟁들이 기록되여있지만 일본처럼 국가권력을 발동하여 성노예제도를 수립하고 녀성들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다니면서 침략야망실현의 수단으로 삼은 야수들은 일찌기 없었다.
일본군성노예범죄야말로 섬나라족속들이 저지른 전범죄중에서도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야만적인 특대형범죄행위이다.
일본군의 롱락물이 되였던 수십만의 피해자녀성들은 결코 《전선의 장병들을 정신심리적으로 위안》하는 녀성들이 아니였다.
그들은 말그대로 녀성으로서,인간으로서의 존엄은 고사하고 초보적인 인권과 생존권마저 모두 박탈당한 노예들이였다.
일제는 녀성들을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치부하며 마음대로 유린하였을뿐아니라 저들의 범죄진상을 가리우기 위해 도처에서 집단적으로 총살하고 불태우고 생매장하여 죽이는 천인공노할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감출수 없는 력사의 진실이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력사기록들에 의해 일본의 성노예범죄가 낱낱이 드러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들에서 관련범죄부분을 삭제해버리고 세계곳곳에서 성노예소녀상의 설치를 막으려고 기를 쓰고 날뛰고있다.
이제는 성노예표현조차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공식문서를 통해 못박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베일당의 후안무치한 행위는 천년숙적의 죄악을 반드시 결산하려는 우리 겨레의 의지를 더해주고있다.
과거청산은 절대로 회피할수 없는 일본의 책임이다.
아베일당은 지금처럼 온당치 못한 행위에 매달릴것이 아니라 성노예범죄만행에 대해 인류앞에 무릎꿇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성근하게 배상해야 한다.(전문 보기)
건축문화유산을 재가루로 만든 죄악
일본이 과거에 감행한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와 략탈범죄(1)
일본은 1592년-1598년 임진조국전쟁시기와 20세기초 우리 나라를 군사적으로 강점하고 식민지통치를 실시한 40여년간 가는 곳마다에서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창조하여온 우리 민족의 귀중한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수많이 파괴하고 략탈해갔다.
일본의 과거 문화재파괴략탈책동은 단순한 강탈행위가 아니라 계획적으로 준비되고 감행된 국가적범죄행위였으며 조선민족의 오랜 력사와 문화, 전통을 말살하여 그 존재자체를 력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한 천추에 용납 못할 반인륜적범죄였다.
일본이 과거에 날강도적인 조선문화재파괴 및 략탈범죄를 어떻게 감행하였는가를 온 세상에 다시한번 폭로하기 위해 이 련재물을 내보낸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은 평양을 비롯한 전국각지의 귀중한 건축문화유산들을 닥치는대로 파괴방화하였다.
1592년 4월 조선남해의 관문인 부산에 대한 침공으로 전쟁을 개시한 침략군은 한성(서울)을 강점한 후 동대문을 불사르는 등 온갖 파괴행위를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조선군대의 드센 공격으로 한성에서 쫓겨갈 때에는 건축물들에 불을 놓아 온 성안을 재더미로 만들어놓았다.
일본침략군의 만행에 의하여 오랜 력사를 자랑하던 조선봉건정부의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리고 홍인문을 비롯한 한성의 모든 성문이 다 파괴되였다.
그야말로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마련해놓은 귀중한 모든것이 하루아침에 재가루가 되고말았던것이다.
성균관은 세계적으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을뿐아니라 인재들을 육성하는데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최고교육기관이다.
이러한 성균관이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의 파괴방화만행으로 건축물들중 대부분이 불타없어졌으며 단지 남은것은 성전협문 및 전사청뿐이였다.성전앞의 비석은 세동강이 났으며 거북모양의 받침돌 또한 뽑혀져서 깨여진채 나딩굴고있었다고 한다.
그로 하여 임진조국전쟁후 우리 나라에서는 인재를 키우는 사업이 일시 중단되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불교사원들도 파괴하였다.경주를 강점한 가또 기요마사는 불국사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였다.
1593년 5월 불국사에 침입한 침략무리들은 사원에 있던 승려들을 죽이고 방들을 불태웠다.그때 란을 피해 장수전에 가있던 담화대사가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 등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다.(전문 보기)
조선학교 유치반의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한 긴급집회 진행
《유보무상화적용을 요구하는 교또조선유치반보호자련락회》(《교또련락회》)의 주최로 조선학교 유치반에 대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요구하는 긴급집회가 11일 일본 교또에서 진행되였다.
재일동포들과 일본시민들 300여명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집회에서는 먼저 지난 10월부터 시행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와 그 문제점에 대한 발언이 있었다.
발언자는 현재 일본당국이 부당한 리유로 조선학교 유치반을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취한데 대해 지적하였다.
앞으로 각종 학교들에 대한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의 전면적용을 요구하는 한편 지방자치체들에서 독자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그는 강조하였다.
《교또련락회》대표가 보고를 하였다.
보고자는 지난 기간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한 항의집회와 요청활동을 벌려온데 대해 언급하였다.
아이들의 권리와 동포들의 존엄이 짓밟히는 현실을 보고만 있을수 없다고 하면서 그는 동포들이 단결하고 일본시민들과 적극 련대하여 조선학교 유치반의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해 싸워나가자고 호소하였다.
다음으로 집회에 참가한 일본인사의 발언이 있었다.
발언자는 재일조선인의 존엄을 짓밟는것이 일본사회이며 일본의 정치라고 하면서 조선학교 유치반의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만을 요구할것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민족교육의 타당성을 인정하도록 해야 할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본인사들이 보내온 련대인사가 전달되였다.
계속하여 조선학교 유치반의 보호자와 교원, 대학교수를 비롯한 참가자들의 발언이 있었다.
발언자들은 민족교육의 핵심은 유아교육에 있다는것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민족교육을 받기 위하여 조선학교 유치반에 다니는 아이들이 차별을 받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아이들이 아무런 불편없이 마음껏 뛰놀며 배울수 있도록 투쟁해나갈것이라고 그들은 언명하였다.
집회에서는 호소문이 랑독되였다.
호소문은 조선학교 유치반의 《유아교육, 보육무상화》제도적용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며 이 투쟁에 대한 지지성원의 목소리가 높이 울려나가도록 할것이라고 강조하였다.(전문 보기)
[정세론해설] : 불법무법의 협잡문서로 국권을 강탈한 날강도적행위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을사5조약》을 강요한 때로부터 114년이 되였다.
오늘 일본반동들은 《을사5조약》을 날강도적인 식민지지배에 대한 법적책임을 회피하는데 악용하고있다.그들은 조선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법적으로 유효》하며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주의는 인간적이였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저들의 극악한 과거범죄행위들에 대한 국가적책임에서 벗어나며 배상을 회피하려고 음흉하게 획책하고있다.
《을사5조약》은 아무러한 법적효력도 가질수 없는 불법무법의 협잡문서이다.
국제조약의 체결은 주권국가들사이의 자원적인 의사합의를 기초로 하고있다.
《을사5조약》은 그 날조과정에 평등의 원리가 전혀 적용되지 못하였다.조선봉건국가의 고종황제와 대신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받지 못하였으며 총칼로 무장한 일제의 로골적인 위협공갈속에 놓여있었다.
날조과정의 비법성은 조선봉건국가의 최고주권자인 고종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한데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였다.
국가들사이의 중요한 조약이 반드시 국가대표자의 전권위임장과 비준을 필요로 하는 형식을 취하는것은 근대시기부터 국제조약체결에서 보편적인것으로 되고있다.일본 근대초기의 권위있다고 하는 국제법학자들이 발간한 《국제법잡지》에 실린 일본을 포함한 각국의 외교협정형식이 그것을 보여주고있다.당시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규제하는 중요조약들은 전권위임과 조인, 비준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것이 국제적인 관례로 되여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노리고 1904년 로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조선의 국권과 관련되는 조약들을 조선봉건국가의 조약체결절차마저 강압적으로 뒤집어엎고 전권위임장과 비준이 없이 날조하는 강도행위를 일삼았다.
그 대표적인것의 하나가 바로 《을사5조약》이다.
국권을 지켜보려는 고종황제의 완강한 태도와 조선인민의 격렬한 반일투쟁기세, 조선을 둘러싼 렬강들사이의 모순관계 등으로부터 위구를 느낀 일제는 《을사5조약》날조를 위해 총과 대포에 의거한 군사적강권을 발동하는 강제적인 방법에 매달렸다.계획부터가 강제성을 전제로 하였던것만큼 그 날조과정 또한 불법무도한 위협과 공갈로 일관되였다는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로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일본군자료들을 모아 편찬한 《륙군정사》에 실린 당시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의 보고서가 그를 실증해주고있다.보고서에서 하세가와는 《을사5조약체결당시 일본군 기병련대와 포병련대까지 한양성내에 투입하여 완전장악했다.》고 하면서 조선강점의 제1공로자가 자기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고종의 반대로 황제의 서명과 국새날인을 받을수 없게 되자 일제는 조선봉건정부 외부대신의 인장을 훔쳐내여 제멋대로 찍는 비렬한짓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을사5조약》은 조약발효의 중요한 절차인 황제의 서명, 국새날인도 없이 날조되였다.합법적조약으로서의 초보적인 형식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국제사회가 《을사5조약》의 강제성을 시인하고 강력히 규탄한것은 너무도 당연하다.1935년의 《하바드보고서》와 1963년 제15차 유엔국제법위원회에 제출된 《월더크의 보고》 등에는 《을사5조약》이 불법적이고 《절대적으로 무효》한것으로 규정되였으며 《일본군대를 동원한 강압적체결》이 그 근거로 제시되였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