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 혁명의 요구라면 못해낼 일이 없다
송 승 필
동만의 각 현에 창설된 유격근거지가 날로 확대강화됨에 따라 이에 당황망조한 일제는 1933년 봄부터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대대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수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내가 있던 연길현 유격근거지에도 달려들었다.
유격대앞에는 간고한 시련이 닥쳐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전략전술적방침에 기초하여 부대지휘부에서는 달려드는 적들을 격파하기 위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였다.
11월 어느날, 우리 병기창성원들은 지휘부로부터 100개의 작탄을 3일동안에 만들라는 긴급한 지시를 받았다.
작탄은 적들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한 작전에 긴급히 필요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우리 병기창의 형편으로 볼 때 참으로 어려운 과업이였다.
적들의 《토벌》로 인하여 약간의 재료와 불비한 도구마저 연화동 수림속에 파묻은채 사방대로 옮겨온 직후였으므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는 무기를 수리할수 있는 약간한 도구외에 한개의 쇠쪼각, 한오리의 철사, 한그람의 화약도 없었으며 일할만 한 장소도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있었다.
《무엇으로 어떻게 100개의 작탄을 3일동안에 만들어낼것인가?》
모든것이 구비된 조건에서 만든다 해도 제기일을 보장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항차 적들의 눈을 피해가며 도구를 가져와야 했고 재료들을 마련해야 하였으니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혁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자고 결심만 하면 못해낼 일이란 없다.혁명의 요구라면 없는것은 만들어내고 부족한것은 얻어내여서 필요한 모든것은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
손발이 움직이고 심장이 고동치는 한 맡겨진 과업을 실천하자.)
우리 병기창성원들은 저마다 이런 결의를 다졌다.
혁명임무를 집행하기 위한 대책을 토론하던 끝에 우리는 재료와 도구들을 해결하기 위한 두가지 방도를 강구해냈다.
우선 적들의 경계를 뚫고 연화동 수림속에 가서 우리가 파묻어놓고온 재료와 도구들을 가져오는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부족되는 재료를 보충하기 위해서 적통치구역에 내려가 쇠쪼각들과 염산성분이 들어있는 흙을 파오는 일이였다.
우리는 각기 임무를 분담해가지고 즉시 길을 떠났다.
그때 나는 몇명의 동지들과 함께 연화동 수림속에 파묻어놓은 재료와 도구들을 가지러 가게 되였다.
날이 저물 때에 길을 떠난 우리는 바위도 얼어터질듯 한 추위를 무릅쓰고 어두운 수림속의 생눈길을 헤치며 밤새껏 걸었다.
적들과의 수차에 걸친 전투끝에 다음날 어두워서야 우리는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할수 있었다.
우리는 재료가 들어있는 독을 파내기 시작하였다.
어둠속에서 손더듬을 하며 땅을 파헤치자니 독이 깨여질 위험성도 있거니와 얼어붙은 땅이여서 삽날이 들지 않아 시간은 몹시 지체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도 지체할수 없기때문에 삽으로만이 아니라 손으로도 언땅을 뜯어냈다.손끝에서는 피가 흘렀다.
우리는 언땅속에서 파낸 재료와 도구들을 나누어지고 사방대를 향하여 급히 돌아섰다.
우리가 림시병기창으로 정한 사방대 뒤산에 도착하였을 때는 자정이 넘어서였다.
림시병기창은 눈속에 절반이나 파묻힌 자그마한 《함지막》이였다.
여름에 서까래대신 나무 몇대를 가로놓고 함지를 파던 이 초막은 바람조차 막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초막을 새로 지을수도 없었다.
작업은 공정단위로 조를 나누어 흐름식으로 진행했다.나는 장약조에서 일하였다.
일에 착수하고보니 우리앞에 가로놓인 난관이란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작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폭약다지기, 폭약의 밀도맞추기, 심지와 폭약과의 접촉작업 등 어느 한가지도 소홀히 넘길수 없는 공정이였으며 재빠른 손동작을 요구하는 작업이였다.
그런데 좁은 초막안에 작업대까지 설치해놓고보니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수도 없었고 터진 손가락은 자꾸만 쑤셔나고 곱아들어서 화약을 다지는 일도, 쇠줄을 감는 일도 뜻대로 해낼수가 없었다.(전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