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성지건설에 온넋을 바친 참된 일군 -216사단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려단장이였던 로력영웅 오학봉동무-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주신 장군님을 영원한 수령으로, 위대한 스승으로 받들어모시는것은 우리들의 응당한 본분이고 도리입니다.》
우리 혁명의 시원이 열린 삼지연군을 전국의 모범군, 본보기군, 세상에 둘도 없는 산간도시로 훌륭히 전변시키기 위한 거창한 투쟁의 갈피속에는 혜산-삼지연철길건설려단 려단장이였던 로력영웅 오학봉동무의 삶의 자욱이 뜨겁게 새겨져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품들여 키워주신 일군이며 돌격대원들과 이 고장 인민들속에서 유능한 작전가, 완강한 실천가로 남다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오학봉동무, 그는 유서깊은 혁명의 성지건설에 온넋을 바친 우리 시대의 참된 일군이였다.
새 세기에 들어와 일떠선 백두관과 백두산지구 체육촌을 비롯한 삼지연읍거리의 문화체육 및 급양시설들, 사회주의선경으로 일신된 삼지연지구의 거리와 마을들, 삼수발전소 그리고 개통의 날을 눈앞에 둔 혜산-삼지연철길에는 투철한 수령결사옹위정신, 당정책결사관철의 정신을 안고 헌신적으로 투쟁한 오학봉동무의 값높은 삶의 자욱자욱이 새겨져있다.
충정으로 높뛰는
심장을 지녔던 열혈의 일군
혁명의 령도자를 굳게 믿고 따르는 절대불변의 신념,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한치의 드팀도, 한걸음의 양보도 없이 관철하려는 결사의 각오, 이것이 장군님의 크나큰 정치적신임과 각별한 사랑속에서 혁명의 지휘성원으로 성장한 오학봉동무의 성격적특질이였다.
백두산지구건설의 나날에 그는 보통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피곤이 정 몰려들면 창문을 열어제끼고 백두의 쩡한 공기를 들이키군 하였다.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사방 수백리에 달하는 광활한 건설전역을 누비며 현장지휘를 전투적으로 하였으며 걸린 문제들을 풀기 위해 집체적협의를 거듭하면서 솔선 방도를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는 삼지연으로부터 평양까지의 출장길을 떠날 때에는 함흥이나 원산에서 쉬는 일이 없이 머나먼 길을 하루동안에 달렸다.분초를 쪼개가며 일하는 그였지만 수도에 도착하면 그길로 반드시 만수대언덕에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찾아 삼가 인사를 올리는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백두산지구를 현지지도하시였다는 소식이 전해진 어느해 겨울이였다.
그는 현장지휘부일군들과 함께 위대한 장군님의 현지지도로정을 따라 눈보라 휘몰아치는 길에 나섰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타신 야전승용차바퀴자욱이 생생히 남아있는 눈길을 걷고 또 걸으며 그는 절세위인의 기상을 감수하였고 현지교시의 기본사상은 무엇인가, 제시된 과업에 담긴 진의도는 무엇인가를 새겨보았다.당에서 중시하는 혁명전적지도로측량을 위해 실무일군들과 함께 발이 닳도록 산발을 톺기도 하고 강추위속에서 주먹밥으로 끼니를 에우기도 하면서 도면을 완성한 실천가였다.…
무산군의 산골에서 열남매의 여섯째아들로 태여난 그는 그 많은 형제가 한날한시에 새 교복을 한아름 받아안던 날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던 어머니의 모습을 늘 잊지 못해하였다.어릴적에 어머니를 잃은 그가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던 날 당원의 영예를 지니면 편지를 하라며 만년필을 쥐여주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친부모의 사랑을 다 받아보지 못한 그에게 군사복무시절과 김일성종합대학에서의 나날은 오직 어머니 우리 당밖에 그 누구도 모른다는 뿌리깊은 신념을 주었다.
하기에 내각사무국에서 일하던 오학봉동무는 새 세기에 백두산지구건설이 시작되자 남먼저 삼지연땅으로 달려갔다.
《지금 온 나라가 백두산으로 달려가고있소.》(전문 보기)